고등학교 삼학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이듬해 대학교에 입학하고 인문학 교양으로 주저없이 서양 역사 문화와 생활 정치학을 들었다. 서양역사와 문화 과목에서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접했고, 정치학과 재수강생들을 위한 보강수업으로 열린 교양수업을 들었다. 대학 생활 4년 간 전공과는 거리가 먼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로크의 사회계약설, 유시민의 책을 읽으며 방황했다.
10여 년 MB-503 정권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민주주의가 망가지는 과정을 보여줬다. 해방 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잔재가 부와 권력을 이어받아 이 나라를 암세포처럼 좀먹어 왔다. 대기업과 권력의 유착, 자본에 예속된 언론의 선동, 두 번의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했던 군부의 부끄러운 역사. 놀랍게도 백여년 전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난과 몰락에서 데자뷰를 느꼈다.
나남 출판사의 번역으로 나온 "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는 전후 독일의 학자 카를 브뤼허의 명저로 알려졌다. 도합 삼천 페이지에 두꺼운 번역본 세 권을 세세히 독파할 수는 없고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
바이마르 공화국(Weimarer Republik)은 독일국의 별칭으로 바이마르 라는 이름은 독일의 도시 중 하나이자 대전쟁의 패전 이후 설립된 독일국(독일민주공화국 Deutsches Reich, 1918.11) 선포 당시 헌법이 작성된 도시에서 인용됐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헌법을 위시하여 기본권 보장, 남녀평등선거권 등 당시 세계적으로 선진적인 이념이었으나 승전국으로부터 강요된 정권이라는 오명, 정권 초기 하이퍼인플레이션의 혼란, 세계대공황(1929~)의 여파로 우경화되었다.
당시 정치지형은 독일 공산당의 반정부 혁명 및 사회혼란 조성과 이를 막기 위한 극우조직들(자유군단, 철모단)과 우파 정권(사회민주당을 위시한 정재계, 검경찰)의 진압,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패배의식을 인종주의와 결합해 악용한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의 활동으로 혼란스러웠다. 정권의 주력이었던 사민당은 굴욕적인 베르사유조약과 승전국의 어용정권이라는 비난 하에 인기가 없었으며 다른 정당과의 연정이 거의 불가능했다. 공화국 체제를 수호할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할 지도자가 드물었으며 그나마도 정치적으로 단명했으며(구스타프 슈트레제만 1923, 헤르만 믤러 1920, 1928-1930),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전근대적인 인물(파울 폰 힌덴부르크)이나 무능한 인물(쿠르트 폰 쉴라이허, 프란츠 폰 파펜)들 뿐이었다.
공화국의 정치 스펙트럼과 위기
18세기, 제국으로 통일된 도이칠란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서구적인 입헌군주제, 정당정치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소수의 지식인들에 의해 바이마르 헌법이라는 당대 최고의 헌법이 탄생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낮았다. 제국 치하 민족주의 이념에 젖었던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된 패전의 충격 - 한때 프랑스를 정복할 정도로 자랑스러운 독일 제국의 몰락,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과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경제,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은 너무나 가혹했다. 카를 브뤼허는 공화국의 태생의 한계를 독일 제국 비스마르크의 철권 통치와 민주주의의 억압에서 찾았으며, 철혈 재상의 능숙한 대-유럽 정치외교가 빌헬름 2세의 친정으로 무너지면서 일차세계대전의 단초를 제공했고 전쟁으로 제국이 무너지면서 바이마르 체제가 탄생했음을 지적했다.
킬 군항의 반란과 11월 혁명(1918.11)으로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스펙트럼은 수용 불가능할 정도였다. 퇴역군인이 주축인 왕당파 우파부터 사업가-부르주아의 권익을 추구한 힘없는 중도우파였던 사회민주당, 계급 투쟁과 사회주의 혁명을 울부짖었던 공산당과 휘하 급진파 스파르타쿠스단, 그리고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스) 등의 당파의 스펙트럼은 너무 간극이 심했다. 첫 비극은 1919년 1월에 발생했다. 사민당에서 갈라져 나온 공산당, 그중에서 급진파였던 '스파르타쿠스단'이 1월 봉기를 일으켰고(1월 봉기) 우익 준군사조직이었던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되고, 주동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린치, 살해당한다. 사민당과 공산당의 이 앙금은 서로의 발목을 잡는데 급급하면서 이후 나치당의 성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게 된다.
1920-3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의 풍경은 공산당과 나치당 돌격대의 격돌, 선동과 정치 깡패들의패싸움의 연속이었다. 1923년 뮌헨 비어 홀 폭동으로 히틀러가 체포되었으나 친 우파적인 법조인들의 배려로 가벼운 형량을 받고 사면된다. 부르주아들은 공산당 세력의 확장에 경계적이었다. 이에 호응하듯 나치당의 초기 이념은 에른스트 룀 주도의 사회개혁에서 히틀러의 친-부르주아로 변질되고 룀은 히틀러가 나치당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접수한 뒤 숙청된다(장검의 밤, 1934).
공화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정치 폭동과 소요의 와중에 신생 공화국군(Reichswehr)의 육군부 총감(지금으로 치면 국방장관) 한스 폰 젝트는 '중립적'이었다. 그는 공화국체제가 제정의 대체제이자 차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화국의 질서가 아닌, 공산당이 정권을 찬탈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반란을 진압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과 해체
베르사유 조약 이후로 사민당 정권하 전쟁배상금을 갚기 위해 찍어낸 화폐로 인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있었지만 토지 기반 신용화폐인 렌텐마르크 덕분에 기적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배상금 삭감 조정 및 해외 자본 투자, 독일 내수경제 활성화를 위한 도스 플랜(1925)과 영 플랜(1929)이 세계 대공황(1929)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면서 경제 혼란기가 찾아온다.
하인리히 브뤼닝 수상의 긴축 정책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의회 해산 및 재선거를 실시했고(1930.9) 이후 공산당과 나치당의 약진에 브뤼닝 수상은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정책을 유지하려 했지만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1932.3, 4) 이후 브뤼닝은 경질된다. 이후 들어선 파펜 내각은 나치당과 협력했으며 파펜의 사주로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프로이센 주 정부의 주 병력인 국기단을 해산시키며(프로이센 쿠테타, 1932.7) 사민당의 지지세력 뿐만 아니라 사민당이 계획했던 반정부 세력에 의한 국가 전복의 예방장치(국기단 봉기)가 붕괴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극단적인 정치 스펙트럼으로 인한 연정의 실패, 집권여당의 부재로 잦은 총선이 치뤄졌는데 7월 총선(1932.7.31)으로 나치당이 1당, 공산당이 2당으로 등극하면서 내각불신임이 가결되고 11월 총선(1932.11) 이후 파펜은 경질되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총리로 취임한다. 권력에서 밀려난 파펜은 나치당과 손잡고 히틀러를 힌덴부르크에게 적극 천거하여 마침내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된다(1933.1.30). 이후 국회의사당 방화사건(1933.2.27)으로 3월 총선(1933.3)으로 나치당이 약진했고 수권법(1933.3.24)의 통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멸망한다.
해제 : 바이마르 공화국과 현대 한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미 100년 전에 지금의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 난산을 겪었다. 1918년, 11월 혁명으로 도이치 제 2제국이 몰락하면서 도이치 국민들은 급작스러운 변화의 충격을 받는다. 국왕은 해외로 망명하고 권력을 가진 강력한 정당이 없는 정치적 공백 상황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시작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운이 너무 없었는데 간신히 일구어 낸 정권 초 민주주의와 경제회복을 세계대공황이 짓밟아버렸다. 공산주의와 나치 돌격대, 전우회 등 극단주의가 성행하고 정국을 흔들었으며 마침내 정부를 무너트렸다.
공화국은 선진적인 제도와 달리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문민통제가 불가능한 군부는 우경화에 방관적인 자세를 취했다. 공산당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공포감으로 정부 요직과 기득권층이 우경화되었으며, 공산당과 나치스와 같은 반정부 정당이 원내 정당에 진입하거나, 비어 홀 폭동을 일으켰던 히틀러가 민족주의-우파 성향의 판사들에 의해 감형받는 등,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이 오히려 민주주의적 헌법으로, 혹은 우파 권력의 보호를 받는 상황이 발생했다. 주요 집권당이었던 중도좌파 성향의 사민당은 인재가 부족했거나 공화국 특유의 군소정당 난립으로 강력한 추진력을 갖지 못했다.
1945년 광복 이후 한반도는사회주의(정확히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좌파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실상은 청산되지 못한친일파의 친미화) 우파의 반목으로 갈라졌다.신생 대한민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을 따와 정부를 세웠다. 좌우의 이념대립은 정치깡패와 린치로, 혹은 4.3 사건과 6.25 전쟁과 같이 끔찍한 학살과 내전으로 표출되었다.
이승만 정권 치하 정치 깡패들의 상대 린치와 테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내내 팽배했던 정치 테러가 오마쥬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베르사유 조약과 루르 점거, 한국은 6.25전쟁과냉전 체제라는 외부 강대국들의 개입이 있었다. (준)군사세력의 정권 개입과 독재, 극단주의로 치달은 점 역시 바이마르 공화국과 한국이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두 나라의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수백년은 봉건제, 최소 수십년 동안 제정 국가였으며, 한국은 적어도 오백여 년 간 조선의 신분제였고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로 수탈당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태생부터 불행했고 행운마저 없었다. 시민들은 극단주의에 빠져 종국에는 공화국의 몰락에 열성적으로 일조했다. 비록 극단주의에 이입하여 민주 정부를 무너트린 실책이 있었지만, 킬 군항의 반란과 11월 혁명을 통해 제정을 붕괴시키고 개국 초기 사민당-기민당 대연정 정권을 만들었으며 프랑스의 루르 점거에 대항해 총파업으로 단결했던 공화국 초기 독일 시민들의 정신은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 비록 친일파 잔재 청산 실패와 냉전과 전쟁, 독재 정권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시작했지만 민족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함, 국민들의 헌신과 희생, 그리고 적절한 행운이 어우러져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성장했다. 전후 극빈의 고통에서 벗어난 국민들은 4.19 혁명과 부마항쟁,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과 같이 끊임없이 자유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투쟁했고 희생했다. 비슷한 봉건주의-제정 치하였던 바이마르 시민들과 달리 한국인들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희생하는 데 서슴지 않았고 이것이 바이마르 공화국과 현대 대한민국의 큰 차이점이 아닐까.
그러나 근래 들어 민주주의의 제도적 비호 아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세력들에 의해 대한민국은 중병을 앓고 있다. 광복 이후 미군정과 박사 이승만에 의해 사면받고 권력을 보전한 친일파 세력과 그들을 비호하는 모 정당의 선동과 날조에서 나치당의 히틀러의 모습이. 보수 정권에서는 정권의 충건으로, 그들의 비대한 힘을 쪼개려는 진보 정권의 개혁안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우경화된 검찰 권력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판사들이. 부정한 권력에 아부하고 옹호하는 자칭 보수 언론이라는 것들에서 괴벨스의 선동이.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베와 메갈리아 같은 극단주의 사이버 투쟁에서 바이마르의 정치깡패들이오마쥬된다. 백년 전 바이마르 공화국의 유산된 모습이.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여러분. - 김대중 전 대통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