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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익스피어 Jun 30. 2024

[제단글] 옛스런 여관의 추억과 여수 여행

- 앱 제시단어 : 여관

[제단글 : '제시단어로 글쓰기'의 준말. 제시 단어를 앱(RWG)을 통해서 받으면 그 단어를 주제 또는 소재로 하여 글을 쓰는 것.]

- 앱 제시단어 : 여관

- 그림 : chatGPT 4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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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의 아내와 연애할 때의 일이다. 사진을 찾아보니 2016년 7월 중순. 엄청 찌는 여름이 바로 코앞이었다.


토~일 양일간 그녀와 함께 여수로 놀러가기로 했다. 나는 여수까지 직접 그녀를 태우고 운전으로 다녀올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꿈도 야무지지... 여수가 어딘데 거길 서울에서 거기까지 갈 생각을 했지?


현재 시간 오전 10:16분 출발시 기준. 새벽에 출발하면 4시간 정도로 나온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당시 우리집은 분당. 그녀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우리집에서 그녀를 태우러 가는데만 최소 1시간은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여수까지는 새벽같이 출발해서 한 번 정도만 쉬고 계속 운전해도 4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우리집에서 출발해서 그녀를 태우는 것까지 더한다면 결국 5시간 내지 그 이상 운전을 해야만 한다는 결론이었다. 아무리 그녀를 사랑하지만, 내가 그 정도의 고생을 해야한다는 건 좀 무리지 싶었다.


참고로, 아내는 그 당시에 면허가 아직 없었거나 방금 막 딴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이명박 정권 시절, 면허 따는 걸 어이없게 쉽게 만들어 줬던 그 시기였기 때문에(참고를 위해 링크를 남겼습니다. ^^), 만약 면허를 따서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내가 핸들을 넘겨주진 못했을 것이다.


고민을 하던 나는 결국 여행 전날, 집에 뭔가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를 대고선 아내의 집 근처에 있는 여관에서 자기로 했다. XX모텔 이라는 곳이었는데,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깨끗하고 서비스 좋은 그런 곳들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장기투숙 가능'이라는 문구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 듯한 그런 곳이었다.


회사일이 끝나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약간은 늦은 시간. 하지만, 그 주변은 유흥가가 많거나 하는 동네가 아닌지라 아직도 방엔 아주 여유가 많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이미 나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쪽을 들어서자마자 내 코를 찌르는 오래된 냄새들. 아직 방을 배정받고 들어서기도 전, 이미 여관 로비와 그 근처의 벽지는 최소 10년 이상 변경하지 않아 노란 색으로 찌든 상태였다. 어디선가 스물스물, 감출 수 없는 담배 냄새가 내 몸 구석구석 스미는 듯 했다.


당장 돌아 나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동네엔 이 가격에 들어갈 수 있는 또다른 여관이란 없다. 이미 고르고 골랐다. 여기가 아니면 약간 떨어진 곳에 하나가 더 있긴 했지만, 여기보다 그리 더 좋지도 않으면서 억울한 돈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냥 눈을 딱 감고 하루만 자기로 했다.


드디어 방을 배정받고 나자, 나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나는 대학 시절 보았던 싸구려 원룸이 연상되었다. 좁은 방에 담배 냄새로 쩔은 작은 침대 하나, 브라운관 TV 바로 다음에 나왔을 법한 화질 구린 TV 한대, 좁디 좁은 화장실 한 개가 딸려있는 방.


처참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다른 이의 TV소리는 방음조차 되지 않아 내 귀를 찔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적어도 그날은 연인이 대실을 했거나 하진 않았다는 것. 그런데, 그것도 당연했다. 아마, 내가 여성이었다면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방이었을 것이다.


불편했던 침대와 역한 냄새, 그리고 옆방의 TV 소리 때문에 나는 몇 시간 마다 한 번씩 계속 잠에서 깼고, 결국 새벽 5시쯤 알람이 울렸을 땐 난 마치 지옥에 온 기분이었다.


"난 오늘 4시간 동안 내리 운전을 해야 한다고!"


이렇게 소리지르며 여관 주인에게 따지고 싶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하룻밤에 2만원 남짓이었던 그 가격은 나를 보며 메롱 하고 혀를 내미는 듯 했다.


자는둥 마는둥 겨우겨우 샤워를 하고 나온 나는 적어도 멘탈이 약간은 무너진 상태로 그녀를 만났다. 그날 밤의 여관 경험을 하소연하듯 풀어놓으며 여수로 떠난 그 길은 예상대로 힘들었고, 중간에 오는 폭우로 기분이 정말 별로였다.


하지만, 그 운전 중에 아내의 배려로 조금씩 기분은 좋아졌고, 사진으로 남기진 못했으나 그 폭우 가운데 찾아냈던 '따봉' 모양을 한 구름은 우리에게 박장대소를 안겼다. 정말 엄지 손가락을 세운 듯한 구름 모양이었다.


2016년 7월 16일에 찍었던 여수의 모습이다. 먹구름은 저멀리로 사라지고 있는게 왼편에 보이고 있다.

결국 그날 오후 우리에게 찾아온 거짓말 같은 맑은 하늘. 이미 머릿속에 그 여관의 악몽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히 그녀와 난 행복한 추억을 쌓고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린 결혼해서, 역시 도봉구 방학동에 살고 있다. 장인장모님께서 계신 곳 주변에 산다는 것은 아이를 가진 그녀에게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전 식사를 하러 나갔다가 위의 그 여관을 발견했다! 와!! 이게 아직까지도 하고 있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예전의 그 일이 생각나니 추억이 돋기도 했지만, 외관이 하나도 바뀌지 않은 그 모습을 보며 담배에 쩌든 그 벽지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오늘은 우리집 청소나 열심히 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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