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앱 제시단어 : 장비
[제단글 : '제시단어로 글쓰기'의 준말. 제시 단어를 앱(RWG)을 통해서 받으면 그 단어를 주제 또는 소재로 하여 글을 쓰는 것.]
- 앱 제시단어 : 장비
- 그림 : chatGPT 4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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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국지를 여러 번 봤다. 어릴 때부터 몇 번을 봐도 재미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더이상 삼국지에 손을 내밀지 못했다.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은데 삼국지는 한 번 들면 읽어야 하는 양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를 기준으로 5권(울집에 있는 책은 5권입니다요)이라는 분량을 자랑한다. 도저히 마음을 차분히 하고 일독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그저, 언젠가 시간이 허락할때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마음만 먹고 있을 뿐이다.
얼마전, 브런치 작가님 중에 삼국지와 관련된 글을 쓰신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문득, 나는 삼국지에 나온 인물들 중에 누굴 가장 좋아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당시 나의 최애는 단연코 관우였다.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싸우기 시작하면 대적할 수 있는 장수가 없었고, 독화살을 맞고 수술을 받으면서도 태연하게 바둑을 두고 술과 음식을 먹은 말도 안되는 캐릭터. 판타지스럽지만 멋진 모습에 꽤나 반했던 기억이 있다.
장비 역시 만만치 않았는데, 장팔사모를 잡으면 세상에 무서울 자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장판교 싸움에서 조조의 수백 군사를 단기로 막으면서 장비의 호통 만으로 조조의 군사를 후퇴시켰던 용맹과 기개는 이제 막 남성 호르몬으로 샤워를 하던 초중학교 Boy 들에게는 얼척 없는 캐릭터였던 까닭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들이 쓰는 무기나 도구들도 항상 화제가 되었다. 가장 먼저 얘기하게 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적토마. 해자를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말이기에, 안그래도 미국에서 넘어온 서부영화에 꽂혀있던 나에게 적토마는 동서양이 퓨전된 느낌의 유니콘급 탈것이었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의 장팔사모, 조운의 청강검을 필두로 각 장수들이 쓰는 무기들은 모두 그들의 능력치를 최대로 끌어올려 주어 사나이들의 아드레날린을 자극시키곤 했다.
그런데, 이런 삼국지 상에 나오는 무기들은 아더왕의 엑스칼리버와는 약간 그 성격이 다른 것 같다.
삼국지의 무기들은 장수의 능력치를 올려주는 역할 정도에 그친다. 관우가 장비의 장팔사모를 들었다고 해서 그 전투 기술이나 능력치가 절반이나 그 이하로 떨어지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더왕의 엑스칼리버는 '엄청 강력한 칼'이라는 그 기능적인 위대함에 더해 '바위에 꽂힌 엑스칼리버를 뽑은 자가 왕이 된다'고 하는, 권력의 정당성까지 부여해주는 기능이 있다. 이쯤 되면, 관우나 장비도 자기 자신이 유비나 조조가 되고 싶다면 어떻게든 엑스칼리버를 뽑아들어야 할 판이다.
예전엔 생각해본 적 없던 이런 비교를 하고 나자, 현대인이 겪고 있는 그 유명한 병, 장비병에 생각이 미친다.
보통은 일반인들이 즐기는 취미 생활에서, 자신이 부족한 실력을 장비로 메꿔보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병적으로 장비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되는데, 이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가 바로 장비병이다.
주변에서 골프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과 간만에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이번에 드라이버/퍼터를 새로 샀는데 그게 얼마나 좋은지~~" 라는 내용. 각자의 집에 드라이버나 퍼터가 한 5~6개씩은 쌓여있는 것만 같다. 아, 당근했을 수도 있겠네.
카메라는 또 어떤가. 내가 알고 있는 한 지인은 카메라 바디만 3~4개에다가 각 카메라에 맞는 렌즈를 종류별로 십수 개나 구매해서 이것저것 써보고, 결국엔 그 모든 걸 잘 보관해야 한다며 제습이 되는 보관함까지 사서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다.
그 장비들만 있으면 엑스칼리버가 아더왕을 왕으로 만들어 주듯 자신의 골프 실력이 갑자기 일취월장할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엄청나게 비싼 라이카의 카메라와 렌즈를 사모은다 해도, 열심히 찍어보면서 연습하지 않으면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되기는 커녕 돈낭비만 하게 될 뿐이다.
안그래도 요즘은 N잡러가 많아지는 추세다. 자신이 가진 직업 외에도 취미나 관심사가 직업이 되기도 하는 다양성의 시대. 그런 시대에 걸맞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져 보는 것은 아주 좋은 현상이라 생각한다.
다만, 조심스럽게 권해 본다. 장비병에 걸리지 않는 방향으로 선택하는 게 어떤지 말이다.
다시 말해, 아더왕 보다는 삼국지가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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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제단글로 '장비'라는 단어를 받아들고선, 어찌 써야 하나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그런 고민은 항상 있어 왔습니다. 어떻게든 끼워맞춰서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 만들려 노력하지만, 때로는 논리적 비약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오늘의 글에서도 그런 비약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제시된 단어를 활용한 이 [제단글]을 쓰면서 항상 조심하는 마음으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면서 마음 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미리 사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