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오 (Elio, 2025)> 스포일러 후기
저는 VHS를 시작으로 인생 대부분의 시간 동안 픽사 애니를 봐 온 올드 덕후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려서, 저는 후반부 주인공 엘리오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엘리오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 이후 커뮤니버스의 일원이 될지, 아니면 지구로 다시 돌아갈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죠. 엘리오를 중심으로 화면의 왼쪽엔 고모인 올가 솔리스가, 오른쪽엔 커뮤니버스 구성원들이 있고요.
그리고 엘리오는 왼쪽으로 향합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믿어주고, 실수조차 너그러이 용서해 준 커뮤니버스를 뒤로 하고, 자기 꿈을 이해 못 해주는 어른, 폭력을 일삼는 동급생으로 가득한 지구를 선택한 거죠. (그리고 학원 폭력 가해자와 친구가 됩니다... 세상에나;;;)
처음에는 제가 일명 '유사 가족 서사'에 환장하는 덕후라서 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거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못마땅하지만 이게 그래도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상업영화로서 맞는 선택이었을 거라고요. 그런데 영화가 끝난 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엘리오가 커뮤니버스의 일원이 되는 것'이 엘리오의 원래 결말이었을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엘리오는 개봉이 1년 이상 연기되는 과정에서 줄거리가 대폭 바뀌었습니다) 그 근거는 엘리오의 첫 번째 예고편이었죠.
2년 전 공개된 1차 예고편 속 엘리오의 캐릭터 설정은 지금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우주선에 납치당할 때도 가기 싫다는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고, 커뮤니버스 대표들 앞에 섰을 때도 '무언가 실수가 있었다'고 해명하죠. 이후 자기를 지구 대표라고 속인 이유도 강제로 기억 소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고요. 정서상 우울하고 고립된 아이는 맞으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계인 덕질을 하진 않았던 겁니다. 이런 아이가 갑자기 커뮤니버스라는 세상을 경험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주인공이 예기치 못한 모험을 통해 가치관의 변화를 겪고 성장하는 이야기>
매우 익숙함과 동시에, 픽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 방식 중 하나입니다. 납치된 니모를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과보호 아빠 멀린이나 (니모를 찾아서), 라디에이터 스프링스 시골 동네에 떨어진 오만방자한 슈퍼스타 라이트닝 맥퀸 (카), 기타 하나 훔쳤다가 저숭라라 가서 조상님까지 뵙고 온 미겔 리베라처럼요 (코코).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엘리오 또한 예기치 못한 모험(=납치)을 통해 많은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했을 겁니다. 전 우주의 고등 생물이 모여 평화롭게 지식을 나누는 공간이라니! 혼자만 끙끙댈 필요 없이 내 생각과 고민을 있는 그대로 나눌 수 있는 곳이 있다니!
그러니 커뮤니버스를 거부했던 초반부와는 반대로, 결말에서는 그들의 일원이 되는 선택을 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오는 자기를 이해해 줄 친구와 동료들이 생겼고, 올가 고모는 우주비행사 훈련*을 다시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커뮤니버스는 소중한 멤버가 한 명 더해지는 거니까요. (*'올가 소령의 우주비행사 훈련'도 여러 번 언급된 떡밥이었으나 제대로 회수되지 않았죠. 저는 이것 또한 스토리 변경 과정에서 생긴 흔적 기관 중 일부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증이 들죠. 왜 픽사는 1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추가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영화의 줄거리를 바꾼 것일까? 기존 스토리대로 만들면 흥행에 실패할 거라는 확신은 대체 무슨 근거로 나온 것일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픽사의 전작인 엘리멘탈의 초반 흥행 부진이었을 겁니다. 엘리오가 개봉을 1년 이상 미루고 전면적인 수정에 들어가기로 한 시기가 엘리멘탈 개봉 이후였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엘리멘탈의 초반 흥행 부진은 코로나 시기 OTT로 직행한 픽사의 전작들, 스핀오프작 '버즈 라이트이어'의 흥행 부진, 로맨스 위주의 마케팅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엘리멘탈이 역대 최저 수준의 오프닝 성적을 기록한 이후, 픽사 경영진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다시 들여다보고 과거의 성공 요인을 되살려야 한다'라고 언급했는데요. 엘리오 또한 이 '프로젝트 전면 재검토'의 칼날을 피할 순 없었겠죠.
1차 예고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기존 엘리오는 훨씬 더 어둡고 진지한 성장 드라마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피트 닥터의 자전적 이야기였던 '엘리멘탈'처럼, 감독 '아드리안 몰리나'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되어 있었다고 하죠. (*영화의 주인공 엘리오 또한 감독과 마찬가지로 멕시코계 미국인입니다)
그러나 감독이 도미 시와 매들린 섀러피언으로 교체된 이후, 엘리오는 어둡고 진지한 성장 드라마에서 가족 친화적이고 밝은 코미디 어드벤처로 방향성이 바뀝니다. 그리고 1년 동안의 수정 작업 이후, 엘리오는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이고요.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지구에 적응 못 하는 아이가 혈연과 지구를 모두 버리고 떠나서 평화주의 외계인 집단과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 '가족 중심 스토리텔링'에 익숙한 경영진으로서는 너무 급진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죠. "너무 새로운 시도는 하지 말자, 정석대로 안전하게 가서 일단 흥행부터 하자"
...그러나 경영진의 기대와는 반대로, 엘리오는 엘리멘탈 때보다도 낮은 3,500만 달러의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하며, 픽사 장편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저 오프닝 기록을 또다시 갈아치우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지금까지 사랑받은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익숙하지 않은 메시지를 익숙하게 풀어내는 특유의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멋지게 추락하는 거야" (토이 스토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 (니모를 찾아서)
"모두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순 없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어" (라따뚜이)
익숙하지 않은 메시지로 관객의 관심을 끌고, 그 관심을 익숙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 몰입하게 만들고, 마지막엔 그 메시지에 흠뻑 빠져들게 만들죠.
그러나 엘리오를 비롯한 최근 픽사 작품들의 메시지는 상대적으로 매우 보편적이고, 익숙하다고 생각해요. 익숙한 메시지로 익숙한 스토리텔링을 이어 가고 있죠. 그것이 더욱더 대중적인 선택이라는 것까지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익숙한 이야기를 극장까지 가서 보기엔... 15,000원이라는 티켓값은 너무 비싸고, 그 절반 이하 가격으로 볼 수 있는 미디어는 너무 많은 것이 현실일 겁니다.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Turn Left'는 영국의 인기 SF 드라마, '닥터 후'의 에피소드 제목입니다. 주인공 닥터의 동료 도나 노블이 자동차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 바람에 닥터가 죽는 평행우주가 만들어지고, 결국 전 우주에 끔찍한 재앙이 닥친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숫자로만 보자면, 작금의 픽사 또한 재앙에 가까운 상황일 것입니다. 수천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신작이 또다시 최저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고, 이번엔 엘리멘탈 때와는 달리 반등의 기회조차 쉽게 보이질 않으니까요. 그리고 경영진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코코 2, 인크레더블 3, 토이 스토리 5 같은 익숙한 이야기로 다시 회귀하고 있고요.
과연 관객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픽사는 어느 방향으로 핸들을 돌려야 할지, 선택은 이제 그들의 몫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