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국은 연예인 더빙에 거부감이 덜할까?

by 얕은생각

결론부터 말씀드려서, 이는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세스의 영향이 꽤 큽니다. 먼저 할리우드부터 살펴보죠. 미국 애니메이션 작업에서는 성우의 연기가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우의 목소리 연기, 그리고 녹음 현장을 찍은 녹화본을 바탕으로 애니메이팅을 설계하죠.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바로 인크레더블의 '헬렌 파'입니다. 영화에서 해당 캐릭터가 대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이는 배우 '홀리 헌터'의 얼굴 근육 특징을 애니메이팅에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이죠. '이렇게까지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해야만' 비싼 돈 들여 섭외한 배우의 매력과 연기력을 100% 담아낼 수 있는 걸 겁니다.

GtK-8UUbQAAJx5W.jpg 출처: 영화 <인크레더블>

그에 반해 한국이나 일본에서 만드는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은 후시 녹음 시스템입니다 스토리보드 단계에서 성우 녹음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배우의 연기가 애니메이팅에 반영되는 구조는 아니죠. 이 경우 애니메이션의 Voice Actor에게 요구되는 스킬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의 연기에 맞춰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을 누군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이미 만들어진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에 내가 타이밍을 맞춰 연기를 더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는 다들 지적하는 것처럼, 전문 성우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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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연예인 더빙이 욕먹는 이유'라고 검색만 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내용일 텐데요. 저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하고 싶습니다. 바로 '캐릭터, 그리고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이라고요.


한국이나 일본의 관객은 캐릭터에서 배우가 드러나는 것에 거부감이 큰 편입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배우 기무라 타쿠야가 하울 역을 맡았을 때, '목소리에서 배우 얼굴이 떠올라서 몰입이 어려웠다'라는 지적이 나왔던 것처럼요. "떡은 떡집에게, 더빙은 성우에게" 어디서 많이 본 반응이죠? 그러다 보니 아예 더 나아가서, 성우가 대외적으로 활동하며 얼굴을 많이 드러내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관객도 많습니다. 캐릭터와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연기하는 배우의 '에고'가 드러나서 몰입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죠.

GtLBw8vbMAMEd47.jpg 출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그에 반해 서양권에서는 애니메이션 더빙도 그 배우의 커리어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경향성이 커 보입니다. 제작진이 캐릭터 디자인 단계부터 배우의 개성을 그대로 살리기도 하고, 관객들도 그것에 거부감을 느끼기는커녕 즐기는 분위기가 더 강하죠. 나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조심스러운 or 당당한 동서양의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순 있겠으나... 거기까지 이야기하다가는 글이 끝이 안 날 것 같으니 더 나아가진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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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한국 배우들은 더빙 수준이 형편없다!"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약간의 변호를 하자면, "모르는데 어떻게 해요!"라는 코멘트를 남기고 싶습니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많으시겠지만 조금만 참고 더 읽어주세요)


할리우드의 경우 실사 영화에도 후시 녹음 시스템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일반 배우들도 성우 훈련을 받는 것이 보편적이죠. 배우로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 역량이니까요. 그러나 한국의 배우들에게 성우 훈련은 '전공 필수'가 아닌 '교양 선택'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한국에서 배우 활동하면서 후시 녹음할 일이 많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한국의 배우에게 '더빙'을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맞습니다. 당연히 그에 합당한 사전 가이드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치 천재 피아니스트 역을 맡은 배우가 피아노를 배우고, 국극 명창 역을 맡은 배우가 판소리를 배우는 것처럼요. 더빙 퀄리티 관련 논란이 생길 때 더빙한 배우 그 자체에 대한 비난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보다는 "배우에게 충분한 더빙 가이드를 준 게 맞는가?", "그저 배우의 유명세만을 이용한 건 아닌가?"라는 질문과 비판을 던지는 게 훨씬 더 합당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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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론 및 제 생각은 무엇이냐 묻는다면, "무엇이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관객과 시청자에게 가장 좋은 방향일지, 한 번쯤 생각해 줬으면 한다"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캐릭터의 매력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표현하는 것도, 배우가 가진 개성과 연기력을 애니메이션에 더하는 것도, 심지어 배우의 스타성을 통해 좋은 작품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것도, 저는 다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여러 조건이 서로 부딪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그것의 기준이 단지 돈과 흥행성만은 아니었으면, 애니메이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저희들도 조금은 생각해 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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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애니메이션, 성우, 배우, 그리고 그들의 팬덤까지 모두가 함께 즐겁고 건강하게 덕질을 이어갈 수 있는 판이 마련되기를, 진심으로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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