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V.19후기를 빙자한 짧은생각
애인님과 저는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 일명 '서일페'에 방문하는 게 연례행사 중 하나인데요. 올해의 서일페는 역대급으로 돈을 안 쓴 서일페였습니다. 10년 가까이 서일페를 다닌 애인님도 "이렇게까지 돈 안 쓴 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만듦새가 부족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작가 부스의 아트/굿즈 퀄리티는 상향 평준화되었다고 느낄 정도로 역대급이었죠. 그런데도 이렇게 구매력이 떨어진 이유를 따져보니까... '기업 부스의 비중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2019년 7월 서일페 개최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전체 부스 중 기업 부스가 차지하는 비율은 6% 정도였습니다 (870개 중 52개). 그리고 올해에는 그 비율이 약 20%로 3배 이상 늘어났죠 (아래의 노란색 박스가 전부 기업 부스). 이 중에는 카카오웹툰, 오뚜기, 빙그레, 칭따오 등 대기업도 많고요.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기업 부스의 비중이 높아진다는 것은 개인 작가, 특히 신규 아마추어 작가의 비중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업 부스는 나쁘다!'는 일차원적인 비난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일반 작가 부스 쪽 밀도가 너무 높아진다는 거죠. 널찍한 공간에서 쾌적하게 방문객들을 안내할 수 있는 기업 부스와는 달리, 작가 부스 구역은 밀려들고 압축된 인파로 인해 고통받았습니다. 작가와 방문객, 양쪽 모두가요.
저는 그나마 방문객 수가 가장 적은 금요일 오후에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어터지는 사람들로 인해 구경은커녕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체감상으로는 마스크 끼고 돌아다녀야 했던 코로나 때 서일페보다 더 답답했어요. 잠깐 멈춰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사람들에 치이고... 평소라면 그냥 툴툴대고 넘어갈 '길막' 방문객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그러다 보니 그림이랑 굿즈 감상도 제대로 안 되고... 결국 저와 애인님은 부스 한 바퀴를 다 돌자마자 도망치듯 행사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엽서와 스티커, 작가 명함 몇 장만 겨우 챙겨서요.
이쯤에서 궁금증이 든 분도 있겠네요. "영화/애니 얘기하다가 뜬금없이 웬 서일페 얘기냐?" 왜냐하면 이 경험이 굉장히 기시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다양한 예술과 재미가 공존하던 공간에
- 대규모 자본과 마케팅이 투입된 콘텐츠가 들어오고
- 이런 콘텐츠가 주류를 차지함에 따라
- 기존 창작자와 소비자가 피해를 보는 상황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요?
일단 저는 극장 영화 업계가 연상되었습니다. 다양한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멀티플렉스(Multiplex)에서 대자본 영화들이 절대다수의 상영관을 차지하고, 결국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선택지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이요. 완벽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는 마치 낙후된 지역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기존 거주민들이 내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처럼 느껴졌죠. 예술이 산업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흐름 중 하나로써 말입니다. 아예 '아트리피케이션 (Art + Gentrification)'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도 될 정도로요.
"서일페에서 기업 부스 비중 높아지는 게 왜 문제냐?"
"멀티플렉스에서 돈 되는 영화만 트는 게 왜 문제냐?"
이에 대한 답변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왜 문제냐"라는 질문의 답과 거의 동일합니다. "다양성의 감소는 곧 집단 생존율의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기업 부스만 가득한 일러스트 페어>
<블록버스터 영화만 가득한 멀티플렉스>
<프랜차이즈 식당과 카페만 가득한 거리>
여러분이라면 이런 곳을 가고 싶은가요?
이런 곳이 과연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부디 다양하고 새로운 씨앗이 싹을 틔우고, 그 싹이 다시 나무로 자랄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이 사회 전반에 걸쳐 조성되기를. 그래서 제가 사랑하는 업계와 창작자들이 오래도록 살아남으며 건강하게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