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뜨거운 여름날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늦은 밤 열대야를 피해 영화관으로 2시간짜리 피서를 떠나는 건 언제라도 좋다.
한 손에는 팝콘통을 끌어안고 얼음 가득히 찰랑이는 콜라 한 잔이면 충분하다.
그 해 여름에도 그랬다.
큰 기대감 없이 더위에 잠 안 오는 새벽, 매번 즐겨 앉는 자리에서 그렇게 처음으로 <뷰티 인사이드>를 보던 날.
당시 2년 가까이 만났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캐나다로 짧은 어학연수 겸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쯤이었다.
동경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수의 예쁨 속 우아함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 스타일, 손끝 하나까지 여자인 내가 봐도 계속 미소 짓게 만드는 캐릭터였다.
사실 이수가 더 빛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었던 우진이와의 좋은 호흡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스테이크가 좋아요, 초밥이 좋아요?
이수에게 처음으로 '김우진'이라는 존재를 알리던 날 했던 질문이다.
요즘 같은 현실에서는 자칫 스릴러가 될 수 있었던 우진의 서툴렀던 작업(?)과 당시의 우진이 박서준이라서 가능했던 풋풋한 멘트는 예상했던 대로 이수에게 먹혔다(?).
물론 비슷한 관심사와 공유할 수 있는 취미, 그리고 동종 업계에 종사한다는 것까지 서로 통하는 것이 많은 둘이었기에 그 거리를 좀 더 쉽게 좁힐 수 있었지만, 자신이 그 누구였을 때라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상대를 대하던 이수가 우진에게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고, 나와는 맞지 않을 것 같다는 편견으로 바라보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 자체로 사랑해주는 것.
영화가 이야기하는 주요 시사점은 그 당시의 나에게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어찌 보면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러 이유 중 가장 컸던 건 그의 외형적인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았던 그 콤플렉스가 만남을 지속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생각보다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고, 점점 그 모습을 회피하려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나도 절대 완벽한 사람이 아니지만(외적으로나 내면으로나), 상대의 그런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랑해줄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팠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생각하지 못한 타이밍에 이미 권태기가 왔었고, 6개월 정도를 서로 불편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결국 헤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인연이 아니었던 거다. 아쉬울 것도, 미안할 것도, 미련 가질 필요도 없이.
서로에게 서로가 아니었던 것뿐.
이 영화를 '인생영화'라고 말하는 이들에겐 각자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흔히 말하는 영상미, 음악, 등장인물 등 비주얼적인 요소를 통해 <뷰티 인사이드>만이 줄 수 있었던 영화의 분위기 때문일 거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인 걸 알면서도 꽤 그럴듯하게 꾸며진 스토리, 그 안에서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만한 요소들, 또 다시 한번 곱씹고 생각하게 만드는 대사들.
이 모든 건 우리가 <뷰티 인사이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게 했다.
사실 영화관에서 같은 영화를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1인이었는데, <뷰티 인사이드>는 나의 그런 공식을 깨준 첫 영화가 됐다.
처음에 영화를 봤던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 일주일 만에 다시 영화관으로 향했고, 몇 주 후 캐나다로 떠났다. 그곳에서도 감성을 채워야 하는 순간엔 <뷰티 인사이드>, 혹은 <비긴 어게인>을 꺼내 보며 감성팔이를 했더랬지.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한국에 와서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고,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남부럽지 않은 연애를 하고 있다.
이 글을 쓰게 된 건 얼마 전 영화를 한 번 더 보면서, 문득 들었던 알 수 없는 감정들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은 걸까?
날마다 같은 모습을 하고,
날마다 다른 마음으로 흔들렸던
어쩌면 매일 다른 사람이었던 건
네가 아니라 나였던 게 아닐까?
이건 이미 영화 속 너무나도 유명한 명대사이면서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매일 변하는 우진이었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수를 대했고 항상 같은 모습을 한 이수였지만, 때때로 흔들렸던 이수의 마음은 온전하지 못했다.
물론,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그 누구도 이수를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마음이 불편한 건 왜일까.
자꾸만 마음이 불편했다.
나도 이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에 그냥 마음 한켠이 찔렸던 걸까.
아무튼 3년이 넘는 짧지 않은 연애를 하다 보면 그 안에서 배우는 것도, 느끼는 것도 많지만 유난히 3년이 되던 해에 여러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나를, 그리고 상대방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나에게 연애란, 결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이 연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이 행복한 연애의 끝이 정말 평생의 동반자가 될지, 다시는 볼 일 없는 남이 될지는 모르지만
서로 노력하고 함께하려 애쓰는 만큼 우리의 미래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있겠지.
p.s. "그 무엇도 네가 없는 지금 만큼 아프지 않았을 것 같아."
그들이 이별한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재회했을 때, 애써 자신을 모르는 척하는 우진을 안으며 이수가 했던 대사다.
지금도 이 대사를 생각하면 누군가가 미래에서 나에게 하는 이야기는 아닐까 괜히 뭉클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