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눈이 내렸다. 한번 내리면 일이십 센티미터는 예사인 곳이다. 비슷한 폭설에 항공편 결항으로 애를 태우던 지난 기억이 생생하다. 다행히 아침부터 눈이 그치고 한낮 눈 부신 햇살에 걱정은 걷혔지만 주위는 그대로 설국이다. 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는 밤새 쉬지 못했을 제설 장비가 아직 더운 입김을 뿜어내고 있다. 저 높은 눈 더미에는 제설 과정에 흘린 땀들이 얼음 결정으로 알알이 박혀 있을 것이다. 늦은 오후 햇살에 살짝 명암이 드러나는 대지와 하늘은 거의 같은 톤으로 이어져 있다. 미국 중북부 한 도시, 차창에 드러나는 공간과 시간은 온전히 눈에 잠겨있다. 국내선으로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인천행 국제선을 타는 귀국 경로다. 공항 활주로 주변에도 눈 더미가 수채화에 그려진 먼 산들처럼 흐릿한 경계를 지으며 늘어서 있다. 이 설국을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 간절한 마음이 솟는다. 출장은 열흘 정도가 심리적 경계인 것 같다. 두 주를 넘기면 길게 느껴진다. 출장업무에 바삐 움직이며 지내다가도 일정을 마치고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마치고 나면 깊은 안도감이 온몸을 감싼다. 도착지 아닌 출발지에서 나는 이미 긴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돌아온 한 척의 작은 배가 된다.
비스듬한 통 유리창 너머로 서편 하늘이 가득하다. 깨질 듯 찬 공기에 위도가 높아서일까? 더욱 선명한 하늘에 해가 빠르게 지고 있다. 붉은 톤 구름들이 띠를 두르고 이어지다가 겹겹이 깊어지고 있다. 구름 자체의 움직임인지 해가 움직이며 지어내는 것인지 아니면 둘의 조화인지. 두꺼워진 색깔들 사이사이 회색 붓 터치가 날렵하게 흐른다. 일몰만큼 속도 있는 시간이 있을까? 빠른 시간과 찬 기온이 차원을 더하며 더욱 신비한 5차원의 캔버스에 붉은색 예술이 펼쳐지고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색깔에 마음 빼앗긴 사이, 게이트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국내선이지만 제법 큰 항공기다.
선이 되어 흐르는 사람들을 따라 복도 편 내 좌석을 찾았다. 창가에 한 노부인이 앉아 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가방에서 읽던 책을 꺼내 들고 앉는다. 깊숙이 등을 기대며 창 밖을 내다본다. 진홍 빛 찬란하던 하늘이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부인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눈 때문에 걱정했는데 탑승해서 다행이라며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샌프란시스코 거쳐 한국에 간다고 하니 목소리가 한층 반긴다. 수개월 전 한국을 잠시 거쳐 갔는데, 인천 공항과 서울의 호텔 등이 매우 깨끗하고 너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외국인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여행길 우연히 마주치는 즐거움 중 하나다. 그렇게 말을 텄다. 한국에도 눈이 많은지, 겨울은 얼마나 추운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여러 대화를 나눴다. 그분이 살아온 시간을 이야기할 때는 마치 긴 강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레스토랑 체인을 운영하시는데, 지난 삶의 과정이 때로는 넓은 강물처럼 잔잔하기도 하고 가끔은 좁고 가파르기도 했다.
듣고 보니 그 레스토랑은 이십여 년 전 내가 처음 미국 도착했을 때 지인이 날 안내한 제법 유명한 양식당인데 들어보니 미국에만 100여 개 정도 체인점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을 거슬러 연결되니 더욱 각별한 느낌이었다. 호기심에 사업 성공의 핵심을 물었다. 순풍을 탄 비행기 소리가 조용하다. 창에 던진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한 가지 지키려 노력한 것이 있지요.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타인을 대하라. Treat others as you would like to be treated.” 사업하면서 간직한 마음이라 했다. 직원들을 대하고 손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기둥이 된 그리고 사업이 성장할수록 더 자주 돌아본다고 했다. 평범하지만 겸손했고 울림이 컸다. 깊은 석회암 동굴에 긴 시간 맺힌 물방울이 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시간은 처음이다. 국내선 세 시간 넘는 내내 일흔이 넘은 노부인과 그것도 긴 출장 후 몰려오는 피곤의 바다를 훌쩍 넘은 대화였다. 책은 들어도 두세 페이지 채 못 읽고 잠들었던 지난 출장들을 생각하면 어지간히 특별한 일이다. 피곤을 잊게 하고 시간을 잊게 하는 대화였다. 공항 착륙 준비 안내에 “겨울엔 눈에 미끄러지듯 비행기도 빠르게 나는 것 같다” 말하며 같이 웃었다. 벌써 수년 전 일이지만 주위에 눈이 가득한 날이면 마른미역 물에 풀리듯 살아난다. 설국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다행이었지만, 내 시간의 창에는 황홀한 일몰이 그대로 담겨 있고 노부인의 겸손한 미소와 울림 있는 이야기가 잔잔히 남아 있다.
이 산은 (李 山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