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백마 탄 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 기다려

by 스더언니

'쌤, 저는 어른이 되면 잘생기고, 능력 있고, 나만 바라봐주는 남자랑 만나서 결혼할 거예요.'


내가 과외를 하며 가르쳤던 모든 여학생들의 이상형은 하나같이 다 똑같았다.


키가 절대 작으면 안 되고, 꼭 재벌이 아니더라도 내가 일하지 않아도 나를 먹여 살릴 만큼의 돈은 벌어야 하며, 나에게 다정해야 하며, 다른 여자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드라마를 보았다. 아니, 드라마를 보기 전, 너무나 거짓된 동화에 세뇌되며 자라왔다.

모든 여자가 어느 날 나에게 유리구두를 들고 운명처럼 찾아올 왕자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모든 동화와 드라마에는 그와의 결혼식 장면이 해피 엔딩으로 쉽게 장식된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여자였다.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나는 그것을 정녕 해피엔딩으로 믿고 싶었다.




당신이 나였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질문하고 싶다.


상황 1.

스물넷. 프랑스에서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Easter Vacation을 맞아 파리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유학생인지라, 변변한 식사는 포기하고, 이왕 여행 왔으니 저녁에 간단하게 맥주나 와인 한잔을 마시며 재즈 공연을 구경하고 싶었다. 길치인 나는,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기웃기웃거리다가 도저히 목적지를 찾지 못하여 저기 한국인처럼 보이는 아무 사람에게 '이 곳을 아시나요?'라고 물었는데, 그 '아무 사람'은 "잘 모르겠어요. 저 지금 배고픈데 밥 먹으러 갈래요?"라고, 나에게 대뜸 식사를 같이하자고 권한다. 배고픈 유학생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그를 졸졸 따라갔다.


그는 나를 파리에서 (나중에 알고 보니) 제일 비싼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한껏 차려입고 오는 식당의 호화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여행객의 캐주얼한 복장에 신경이 쓰이는 나와 달리, 그는 여유롭게 메뉴를 이것저것 주문하였다.


그가 나에게 '학생이세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제야 그가 어눌한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 그가 캐나다 교포라는 사실을 알았다. 계속 학업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졸업 후 인턴쉽을 할 예정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가 대뜸 또 말한다.


"우리 회사에 오면 인턴쉽 할 수 있어요."

"네?"

"ㅇㅇ.(회사 이름) 구글링 해보세요."


알려준 대로 회사를 구글에 다 치기도 전에 자동완성이 되었고, 내 앞에 앉아있는 그의 사진과 이름이 함께 나온다. 그는 유능한 사업가였다. "아.. 대표님이시구나." 급 공손해진 나에게, 그는 내일 파리에서의 일정이 어떻냐고 물었다. 여행 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함께 다니자는 제안에, 이 사람 신원도 밝혀졌으니 뭐 그러지. 하고 다음날과 그다음 날 일정을 함께하였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사업이 커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고, 학부만 하려던 나에게 무엇을 전공하던 일단 대학원을 진학하는 것이 아무래도 앞으로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학교 과제로 인하여 다시 릴에 돌아가는 테제베에 올라타는 나에게 그가 다급하게 말한다. "나는 Business man이야. 나는 늘 내 앞에 chance가 있었고 I never missed it. 그런데 I think you are the one. It could be my biggest opportunity in my entire life."라고 급 프러포즈를 한다. 당황한 나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심쿵한 나의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상황 2.

스물아홉. 상해에서 한창 영어 과외를 할 때였는데, 내가 잘 가르친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자신도 과외를 받을 수 있냐고 문의가 들어왔다.


채팅창에서는 사진도 없이 자신이 완전 영어 초보이고 상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부탁한다는 말 밖에 안 했으므로, 그가 직장을 다니는 남자 사람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지 못하였다.


약속된 카페에 들어갔는데, 세상에.

언뜻 봐도 키가 190cm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게다가 차은우 닮은 사람이 일어나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상상하지 못했던 인물이라 조큼 놀랐으나, 훗, 나는 프로니까. 학생을 사심 없이 대하며 과외를 이어갔다.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영어로 진행하며 그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상해에서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 나보다 세 살이 어리다는 것, 연예인을 많이 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과외를 한 달쯤 했나? '선생님, 저녁 대접하고 싶습니다.'라고 한다. 수업을 마치고 식당으로 가는데 빨간 벤츠를 끌고 온다. 차알못인 나도 벤츠가 좋은 건 아는데, 그 차는 좀 많이 좋아 보였다.


그가 식사를 하며 말한다.

"누나라고 해도 될까요? 사실은 처음부터 누나가 좋았어요."









자, 당신이 나였다면. 위의 상황에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여자라면 한 번씩은 상상하는 로맨틱한 상황 아닌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 상황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상황 1의 남자는 너무나 바쁘다며 일주일 동안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으며 -그러는 와중에 페이스북에는 파티에서 만난 다른 여자와 찍은 사진을 올렸다.-, 상황 2의 남자는 룸살롱을 가는 것쯤은 아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분명 동화나 드라마에서는, 저 상황이 끝이었는데 현실은 달랐다. 인기있는 모델인데 엄청난 바람둥이, 유능한 자동차 디자이너인데 분조장, 유명한 투자 전문가인데 일부다처제를 원하는 사람.


와우! 했던 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는 하루 종일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꼭 쥐고 잠이 들었고, 늘 울었다.

남자 학생을 받지 않아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게 되어 나의 밥줄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들은 몇 년째 나의 글에 등장하면서 ㅄ이라 불리며 나의 복수를 맛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신데렐라, 인어공주, 라푼젤에 나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왕자인데 '그가 어떤 성격을 가졌느냐.'는 묘사되지 않는다. 집요하게 집집마다 구두를 들고 찾아 헤매는 신데렐라의 왕자가 스토커에 유리구두라는 패티쉬를 가진 변태였을지 누가 아는가. 백설공주가 일곱 남자 난쟁이들과 동거를 하며 무슨 일이 있었을지 누가 아는가. 인어공주의 왕자도 결국 자신을 살려준 보배를 알아보지 못하고 여우 같은 마년에게 홀딱 넘어간 멍청이지 않았는가.


왜 죄다, 왕자의 권력과 지위는 묘사되는데,


결혼을 준비하며, '왜 저딴 애를 데려와!!'라고 구박했을 신데렐라 시어머니와, "난쟁이들과 사는 동안, 정말 아무 일도 없었소?"라고 묻는 왕자의 의심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실제 인생과 연애에는 이런 것들 때문에 울고 웃는데 말이다.







결론은, 이 세상에 완벽하게 백마 탄 왕자는 없다는 것이다.

왕자 따위는 기다리지 말라는 말이다.


만났다 해도, 그 왕자에게는 큰 하자가 있을 터인데, 하자가 발견되었으므로 이미 백마는 사라진 평범한 왕자일 뿐이다. 우리가 교육받은 대로, 세뇌된 대로, '왕자'와 같은 너무 외적인 요소에 끌리지 말라는 것이다.


로맨틱한 상황이 그를 왕자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이 끝난 뒤에 맞이할 함께라는 현실인데, 그 현실에서마저 그는 혹은 그녀는 왕자인가, 공주인가 이다. 그런 운명 같은 상황도 너무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남편을 전 직장에서 만났다.


회사 대청소 날에, 그는 모두가 열기조차 꺼려하는 냉장고에서 몇 년 묵은 족발이며, 구더기가 잔뜩 묻어있는 빵을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 아무렇지도 않게 담았다.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는데 회식 장소에서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에게 껌을 사는 모습을 보고 나는 감탄했다. 한없이 무뚝뚝한 대리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다정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백마를 타고 화려하게 등장하지 않았으나,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였던 꽃을 선물해주었고, 내가 아침을 먹지 않는 것을 알고 늘 책상에 따뜻한 두유를 챙겨주었다. '연락할게.'라고 약속하지 않고, 그냥 연락을 해주었으며, 같이 길을 가면서도 한 번도 나보다 예쁜 여자에게 눈을 흘기지 않았다.


지금도 남편은 추운 날씨에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의 전단지는 꼭 받는다.


사람의 사소한 다정한 습관은 현실에서도 이어지는데, 요리하는 나를 뒤에서 가만히 안고 꼭 고맙다고 해주고, 내가 외출할 때면 나의 신발을 신기 좋게 돌려주고, 음식물 쓰레기도 마다하지 않고 치워주며, 떨어진 단추도 직접 달아주고, 다음 날 입을 출근 옷도 나보다 더 잘 다려준다.


다른 사람에게는 무뚝뚝하고 무서워 보여도 나에겐 한없이 자상한 매일의, 그리고 내가 그렇게나 애타게 찾고 찾던 현실의 왕자님이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잘생기고, 키가 크고, 나만보는 돈 많은 '백마를 탄 왕자님'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진짜로 어쩌다가 백마탄 왕자를 만날 수도 있다.

근데, 당신 자신이 공주, 혹은 왕자이냐는 말이지.



그러니까 제발 그만 기다려.



Ps. 그렇지만 추운 날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줄 수 있는 현실 왕자님이, 혹은 선녀가 의외로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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