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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더언니 Dec 10. 2015

머리의 사람, 심장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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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을 만나고, 참 많은 것에 손을 대고 있다.


8시부터 시작되는 잔혹한 학교 수업은 눈을 비비며 꾸역꾸역 버티고 있으며,

일이 있을 때마다 감사하게도 다시 찾아주시는 업체 분들이나 학교 통역도 가고,

피아노 과외도 하고, 영어 과외도 한다.

'언제 한 번 밥 먹자'라고 이야기했던 사람들과의 약속을 연말이 가기 전에 지키고 싶어 그들을 몽땅 집에 초대하여 밥을 해 먹였고,

사업에 필요한 아이템들을 꾸준히 하나하나 집에 업어왔으며,

2015년 버켓 리스트였던 음반 리코딩도 -비록 나의 앨범을 위한 작업은 아니었으나- 아무튼 같이 즐겁게 마무리하였고, 그와 동시에 집에 홈 리코딩 장비-콘덴서 마이크나 오디오 인터페이스-까지도 얼결에 다 구비가 되어, 내년에는 곧 오게 되는 사촌동생과 함께 더 그럴듯한 음반 제작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감을 잃지 않기 위해 한 달에 한번쯤은 촬영을 꾸준히 하고 있다.

교회라는 공동체에 아직까지도 어설프게 소속되어 있지만, 얼마 전에 교회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특송으로 불렀는데, 그동안 SCF 곳곳에 숨어 계시는 한국 분들께서 -나도 몰랐던 그분들께서- 힘차게 같이 불러주시고 인사해주셔서 '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맞는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한국인의 긍지도 조금 느꼈던 것 같다.

책을 쓰기 위하여 이동 중에는 간간히 떠오르는 생각들은 메모를 해놓는데, 그 조각들을 다 모으지는 못해도 이렇게  한데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좋다.

졸업 논문은 원래 ‘단색화’ 쪽으로 추진했었는데, 놀랍게도 교수님께서 ‘중국 기독교 미술’에 대해서 먼저 제안하신다. 아직 깊이 있게 파보지는 않았지만, 몇 장 되지 않은 그림을 찬찬히 보며, 전에 읽었던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스탠리 존스 저) 대신, 중국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를 보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많이 뭉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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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냐는 질문에 ‘응’이라고 대답하지만,

그래도 나는 조용히, 오늘을 보내고 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하이에나처럼 어느 파티가 즐거울까 이 곳 저곳 기웃거리기가 다반사였지만, 최근 나의 몇 달간의 변화는 잔잔하지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알코올 중독처럼 집에 쌓아놓고 매일 퍼마시던 맥주도 시큰둥 해졌고,

담배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억지로 참아야 했던 담배도 이제는 냄새마저 싫다.

늘 킬힐에, 달라붙는 원피스를 즐겨 입던 내가, 요즘은 촬영을 위한 의상 외에는, 운동화와 넉넉한 스웨터, 점퍼가 제일 좋고, 화장도 비비에 아이라이너가 전부인 날이 많아졌다.

인스타도 비공개로 바꿨는데, 이제는 지나가는 누군가가 나에게 외모에 대한 칭찬을 해주면 듣기가 많이 거북해진다.

금사빠인 내가, 소위 말하는 ‘금수저’ 남자들이 이상하리만큼 끊임없이 많이 꼬여도, ‘진짜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그들에겐 급 흥미가 떨어진다. 집에 오면 꼭 챙겨보던 드라마나 예능도 별로 재미가 없어졌다. 대신 건반을 잡고 미친 여자처럼 울고 웃고 마음을 쏟는 시간을 통해 나는 삶의 여유를 찾으며, 마음속에 흐르는 평안이 나에게 사라지지 않기를 매일매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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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다.

많은 것을 애쓰며 노력하며 살던 예전과는 다르게, ‘억지로’가 아닌, 쉽게 변하고 있다.



게다가 예전 같았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하면서 말이다.

내가 경험하는 이 몇 가지의 변화는, 비록 들쭉날쭉 기복이 심하긴 하지만, 그 넘어지는 실패를 통해서 더욱 단단해지고, ‘얼마나 많이 넘어지느냐’가 아닌 얼마나 빨리 일어나느냐에 방향을 두는 것이다.



‘외로운 가슴을 이제 다시는 사람이나 다른 어느 것으로 채우지 않을래.’라고 마음먹고, 내가 마주하는 고통도 묵묵히 견디다 보니 이런 변화들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많은 교회에서는, 결단하고 노력해야 변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열심히 주의 영광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교리를 가르치고 제자 훈련을 하고 열심히 성경을 외우게 하지만 오늘날의 신자의 모습은 믿지 않는 사람과의 가치관이나 성공 기준이 별 다르지 않다.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의 기준이, 심장이 아닌, 머리를 채우는 것들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베스트셀러 조웰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 대표적인, 그리고 안타까운 예이다. 교리나 훈련을 통해서가 아닌, 주님 자신을 가르치며 주님을 호흡하며 동행하며 진정한 행복을 위해 심령을 채우라고 말하는 교회는 드물어졌다. 형통의 기준이 눈에 보이는 것, 머리를 채우는 것이 되어버렸다.


진리는 가슴에서 나오는데 말이다.




(전도서 12:12)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고 전도서는 이야기한다.



세상에는 머리의 사람, 그리고 심장의 사람.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심장, 영혼으로 사는 사람. 머리, 생각과 논리로 사는 사람.

몸, 육을 즐기고 먹고 마시고 편히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


뭐, 이렇게 세 종류로도 나눌 수 있지만 사실 육을 즐겁게 하는 것은 곧 머리를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

육체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 먹는 것을 즐기고, 성을 즐기고, 육체의 쾌락을 즐기고..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몸이 즐기는 것이 아니고 뇌가 몸의 상태를 인지하고 뇌세포에서 쾌락을 느끼는 것이니까.



아무튼, 머리를 채우는 것과 심장을 채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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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 월세가 밀렸으니.. 이것만 갚으면 행복할 거야.. ’ 하고 생각하는 것이 뇌의 착각입니다. ‘결혼만 하면, 이 문제만 해결되면 이것만 이루어지면 행복해질 거야’



이러한 것이 곧 뇌의 허상에 속아 착각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어떤 생각이 맞다고 확신하고, 이것만 이뤄지면 잘될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속임입니다.



이것만 끝나면 여유가 생길 거야.. 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지금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실제로 여유가 생겨도, 누릴 줄을 모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뇌의 허상, 뇌의 착각 속에 사는 것이고, 뇌를 채우는 것입니다.


결국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것도 뇌를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고 넓은 집에 사는 것.. 등 몸 자체가 누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뇌 속에서 ‘ 아.. 내 통장 잔고가 올라갔지..’ 하는 것입니다. 뇌의 개념으로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자다. 만족한다.’ 하는 것도 결국 뇌를 채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 머릿속의 허상이며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눈을 믿고, 내 생각을 믿습니다. 눈을 통한 만족을 얻기를 원하고, 정보와 지식을 얻기 원합니다.

그러나 뇌는 허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뇌에서 오는 만족은 허상이며 거짓된 것입니다.


-2013년 3월, 예배 메시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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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을 당할 때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아프다. 사람이 괴로운 것은 가슴이 아파서 괴로운 것이다. 머리를 아무리 채우고, 돈을 얻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어도 행복하지 않다. 사람은 지식이 모자라서 자살하지 않는다. 가슴이 아파서 죽고 싶은 것이다.


새벽에 술에 취해 ‘내 인생 왜 이러냐, 왜 이렇게 허무하냐..’ 울먹이며 전화하던 예전 남자 친구는 전 세계 도처에 집이 있고, 전세기까지 있는 남자였다.



행복은 가슴에서 온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가슴,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배가 너무 고픈 상태로 짜장면 집에 가서, 호기롭게 짜장면, 탕수육, 볶음밥을 다 시켰고 ‘핡, 다 먹어버릴 거야’라고 결심해도, 실제로는 반도 못 먹게 되는 것. 조금 전에는 배가 고파서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을 보고.. 비로소 다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생각이 나의 한 순간의 오기였음을 곧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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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함은 머리를 채우는 삶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후유증이다. 공허함이 오면, 함부로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공허함과 외로움은 영혼의 탄식이다. 조용히 끔찍한 그 고통에 머물러 있으면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잔잔히 흐르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변화는 환경이 바뀌는 기적을 통해서 오지 않으며, 오직 '고통'이라는 충격을 통해 변화된다.

그러나 보통 이 고통을 마주하기 싫어 끊임없이 눈을 채우고 머리를 채우는데, 그것은 중독을 일으키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하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사업도 안정적으로 잘 꾸려나가고, 그렇게나 원하던 아우디도 뽑게 되었지만, 그저 허무하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진짜 꿈은 평생 이루지 않고 그냥 남겨만 놓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 것이 과연 내 주변 사람들만 하는 이야기일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공감하고 있는 내용 아닐까..?


그렇다. 머리를 채우는 일. 그 기쁨은 순간이고 오랜 허무함과 갈증을 일으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의 경우, 외로움이라는 텅 빈 공간에 늘 '연애'를 모셔놓는 것이 습관이자 중독이었다)


그리고, 결국 머리에는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없다는 것도 이제 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넘어질 내 병신 같은 모습도 안다. 하지만 괜찮다. 그런 끔찍한 내 모습, 빈틈 많은 나의 모순덩어리 삶을 통하여, 지침이 무엇인지 내 오랜 경험을 통해 알았으니, 이제 어느 누가 넘어지면 나는 그가 충분히 지친 후에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자극적이고 요란하지만 끝이 허무하고 찝찝한 머리의 삶과, 은근하고 고요하게 시작되지만, 멈추지 않는 끝없는 만족이 있는 심령의 삶..

이 두 삶의 차이가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물론 나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가 있다. 당장 다음 학비가 준비되지 않았으며, 사업을 하는데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소송을 가야 하나 하는 사건도 있었다. 졸업을 하고서의 나의 뚜렷한 진로도 모르며, 남자 친구도 없는데 결혼을 할리가 만무하다. 그 와중에 이상한 병신들이 꼬여 한 동안 고생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많은 문제 가운데서도 나는, 여전히 행복하며 평안하며 '이 길이 맞다'라는 확신이 든다. 지금 당장 죽어도 억울하지 않다.


가슴에서 나오는 평안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러므로 나는 꿈을 이뤘으며, 내일도 내 가슴의 꿈을 이뤄야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이 심장의 기쁨을 맛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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