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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고 싶었다.
쉴 새 없이 들락거리던 페북을 탈퇴하니, 900명 가까이 되었던 친구들의 목록은 그렇게 한 순간에 사라졌다.
온갖 예쁜척 귀척으로 사기성 짙은 나의 카톡 프사는 이내 사라졌고, 나는 모든 단톡방에서도 나왔다.
그렇게나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발랄했던 내가, 모든 연락을 다 끊었다.
아무도 모르게 지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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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회는 갔다.
대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교회.
설교는 한국 교회라면 흔히 들을 수 있을법한 번영의 하나님, 믿고 기도하면 복을 줄거라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목사님의 설교보다도 등 뒤에 십자가만을 뚫어져라 보며 한참을 울었다.
목사님의 설교보다도, 초라한 십자가가 나에게 더 큰 위로였다.
끝나고 사람들이 모여 서로 기도제목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사람들은 취업준비,
시험 합격,
나를 짜증나게 하는 상사가 나를 괴롭히지 않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제목을 내놓았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조용히 말했다.
“살다 보면 죽고 싶을 때가 가끔 있는데, 지금이 그래요.
하는 일마다, 손대는 일마다 기가 막히게 막히고, 내가 마지막까지 믿었던 단 하나의 그 것도 어이없게 떠나가더라구요.
이제껏 늘 떠돌아 다니느라, 아니 어쩔 때엔 쫓기느라 짐도 풀지 않고 한 달에 한번 이사를 갈 때도 있었고,
1년을 살았다면 정말 오래 산거에요.
지금 내 욕심이라고는, 이젠 그 삶이 지긋지긋 해져서...
박스가 아닌, 옷걸이에 내 옷을 걸고, 내 공간에 내 물건이 오랫동안 있는 것을 보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나 큰 욕심인가요?”
순식간에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내가 이런 실례되고 사회성 없는 발언을 하다니.
그도 그럴 것이,
예고 작곡과를 준비하던 나에게 난데없이 중국 행, 돈이 없어서 학교도 다녔다 말았다 하길 밥 먹듯이 하고, 수시로 이사하고, 그 와중에 먹고 살려고 4시반에 일어나고, 존나 안 해본 일 없이 닥치는 데로 다 해보며, 잡상인 취급 당하고 온갖 사람에게 무시와 수모는 다 당하면서, 결국 9년만에 대학 졸업장이라는걸 가졌는데, 직장 다니다 아프고, 꼴랑 가졌던 몇 푼 없어지고, 일도 안 구해지고, 또 존나 어이없게 파혼당하고,
참나, 그래도 뭐 좀 해보겠다고 편의점에 가서 알바를 하려고 해도 어제 사람이 찼다고 빠꾸를 먹으니.
나는 이런 내 인생에 대해서 누군가 에게는 말해야만 했다.
누군가 작정하고 나를 이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서 엿 먹이지 않는 이상 어쩜 내 인생이 이렇게나 기구할 수가 있을까.
나는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잠을 자는 것 뿐이었다.
곰팡이가 가득한 어두컴컴한 방 침대 위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시 눈을 떠서 한참을 다시 울고... 그렇게 눈물이 배개를 적셔 울다 지쳐 잠들기를 몇 달은 한 것 같다.
심각한 무기력증과 우울증으로, 먹는 것도, 화장실을 간다라는 것도 내게는 사치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쩌다가 밖에 나가 길을 걸을 때면 자연스럽게 차들이 나를 치는 상상을 하게 되었고, 눈 앞에 보이는 모든 높은 건물들의 꼭대기가 얼마나 포근해 보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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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스물 세살만 같았어도 이런 나를 억지로 부정하고 억지로 극복하고 벗어나려고 부던히 노력하고 최대한 밝으려고 노력 했겠지만.
그 때 내게는 그러할 힘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제 정신이 아닌 채로 실컷 울었고, 나는 실컷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그래, 나는 어쩔 수 없어.. 이 끔찍한 내 모습이 진짜 모습이구나.'
진저리 치게 싫은 내 모습을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라던 노력을 멈추고, 포기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계를 인정하기 시작했던 그 때 부터,
나는 내 안의 떠오르는 슬픔이라는 감정들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또 다른 어두운 나'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부터였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슬픔과 고통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되,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사소한 것들이 눈에 더 크게 보이게 되었다.
날씨도, 꽃도, 바람도, 하늘도, 그냥 나를 위한 것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게 되었고..
지나가는 아저씨가 수레를 끌고 가면 같이 밀어주기도 하고, 경비 아저씨에게는 최대한 밝게 인사하였다.
어느 할머니가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갈 때면 모르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지하철 타는 곳까지 배웅해 드렸다.
새벽부터 나와서 길에서 우유를 파시는 어머니를 보면 이상하게 눈물이 났고,
청소하시는 어머니들의 거친 손이 큰 존경으로 다가왔다.
한 번은, 밤 12시가 다되어 미니스커트를 입고 큰 반려견과 같이 경복궁 근처를 산책하는 시각 장애가 있는 예쁜 아가씨를 보게 되었는데, 나는 혹시나 그녀가 취객에 밀쳐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몰래 옆을 조용히 걷고 있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곧 나의 발자국을 캐치하고 ‘누구세요?’ 라고 묻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이름이 뭐에요?” 라고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이제껏 살면서 옆에 걷고 있던 강아지 '포비'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먼저 물어봐 주었던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며 무척이나 고마워하였다.
그 후에도 우연히 그녀를 또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통인 시장 근처 여느 슈퍼에서 물건을 사는 목소리만으로 나 인줄 알고 다시 내게 인사를 했다.
그 때 나는 이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하루하루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어떤 형태로던 어제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나의 하루하루의 꿈이었기에 80도 되지 않는 쥐꼬리만한 월급이었어도 괜찮았다.
당장은 먹고 살만하였고, 가끔 편의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사먹을 수 있었다.
아직 슬픔이 쌓여있더라도 점심 시간마다 피아노와 함께 목 놓아 울 수 있었던 문을 열어두었던 근처 고마운 교회도 있었다.
죽도록 힘들었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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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살아갈만 하구나...
모든 것이 그러려니,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게 될 쯤,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그렇게나 바라던 상해에 왔고,
지금 이 곳에서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사소한 행복들이 사실은 얼떨떨 할 만큼 분에 차게 감사하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벌레도 고통을 싫어하기는 마찬가지다. 바퀴벌레를 죽이려 들면 미친 듯이 어둠 속으로 도망가는 것이 그들의 본능이다.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지나간다.
고통을 피하면 피할수록 비슷한 문제로 나를 언젠가 더 크게 조여오는 것이 인생이다.
지금 느껴야 할 고통이 있으면 그대로 견디는 것이 답이다.
네모가 세모로 되려면 전기이던 망치이던 어떤 종류의 충격이 있어야 변할 수 있듯이, 고통은 어떻게든 사람을 변하게 한다.
그 것이 좋은 변화이던 나쁜 변화이던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마음에 온전한 선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고통을 통해서 점점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의 행복을 위해 살게 된다.
화려한 행복이 거짓이었음을 점점 알게 된다.
고통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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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돌이켜보면 내가 겪었던 이런 모든 일들은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나란 사람은 그 분이 보시기에 워낙에나 연약하고 부족해서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실려고 지금까지 하드 코어로 인도하신 듯 하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굳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도 대충 말하면 알아듣는데 나는 워낙에나 띨띨한갑다ㅎㅎ
스더야, 그러니까 그 날을 기억하자.
힘들어도 행복했던 순간을 잊지말자. 앞으로 어떤 고통이 와도 도망가지 말자.
평생 더 아프더라도 사랑하며, 그렇게 진짜 행복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