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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차갑지만 햇살이 나른한 어느 토요일 오후, 민영이와 밤이 아닌 낮에 술집이 즐비한 용캉루에서 (지금은 다른 곳이 되어버렸지만) 용케도 찾아낸 커피 맛이 좋은 Grifiin coffee 에서 가볍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호호 불어가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민영이가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어, 얘 여기 있나봐. 어딨지?”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보며, “왜? 누가 있어?” 라고 묻자, 바깥에서 손을 흔드는 어떤 여자를 발견하자마자 ‘어머, 어머’ 호들갑을 떨며 뛰쳐나갔다. ‘아는 사람이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그 사이 혼자가 된 나도 괜히 멋쩍어 휴대폰을 끄적이고 있을 때, 민영이는 그 ‘어떤 여자’를 데리고 와 인사를 시켰다.
“야, 얘도 너 안대! 얘도 블로그 한대!” 얼떨결에 일어나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고 그 ‘어떤 여자’를 그제서야 자세히 보는데, 웃음이 귀여운 친구였다. “언니, 저 알아요? 저 아이디 곰돌곰돌인데..”
“아, 곰돌곰돌!!” 이내 웃음이 났다.
예전 그녀의 포스팅을 쭉 훑어보다가, 그녀는 어렸을 때 우리가 보고 자랐던 천사소녀 네티의 주제곡을 따라 부르면서도, ‘오늘 밤엔 무슨 일을 할까, 누구에게 기쁨을 줄 까.’ 라는 대목에서 '이 네티라는 언니 참 피곤하게 사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는 그녀의 일기 같은 포스팅에서 엄청 웃었는데, 그 획기적인 생각의 주인공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반가워요. 포스팅 읽으면서 너무 빵 터졌었는데, 상해가 진짜 좁네요.” 민영이는 옆에 두었던 가방을 한쪽으로 치우며,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효영이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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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나른한 어느 토요일, 이제는 익숙한 습한 바람이 많은 잔잔한 상해의 가을,
우루무치난루에 위치한 Black Bird에서 오랜만에 다 같이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여자 넷의 폭풍 같은 수다 사이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며, 테이블 위에 놓여진 효영이의 폰에 잠깐의 알람이 켜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와 동시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다정하게 나온 사진이 배경화면이 눈에 띄였다..
나는 다시 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이번 남자친구는 어때? 그래도 만난지 꽤 됐지?” 효영이 옆에 있던 혜리도 같이 배경화면에 눈을 흘기며 거들었다. “그러게, 그 때가 봄이었잖아. 벌써 6개월 지났네?” 안 그래도 수다를 떠느라 모두가 다시 배가 고파질 때쯤, 효영이는 이미 메뉴판을 쳐다보며 “언니, 이번 남자친구는 제가 만나 본 남자 중에 제일 괜찮은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내가 “왜? 사람 괜찮아?” 메뉴 중의 바닐라 팬케이크를 가리키며, 두리번거리며 종업원을 찾으며 묻자, 그녀는 손을 들어 “服务员!(저기요!)“이라고 외친 뒤, 곧 “아니 그냥 다요. 다, 진짜 다.” 라고 한다. 그녀만의 귀여운 웃음과 함께.
“야, '다'래자나. 그럼 끝난거야.” 다음 차례로 화장실에 다녀온 민영이가 자리에 앉으면서 핸드 크림을 꺼내 바른다. 나는 실실 웃으며 이어 물었다. “나는 있지, 효영이가 말할 때 마다, 음란마귀가 내 귀에 달라 붙는거 같아. 그 ‘다’라는게 '스' 로 끝나는건 다 잘한다는 말이지?” 효영이는 민영이를 도와, 우리가 다 먹어 치워버린 접시들을 한 쪽 구석에다가 모아 놓고, 새로 주문하여 나온 바나나 팬케이크를 테이블 가운데에 놓았다.
“꺄흐으크큭 언니, 아, 근데 언니 맞아요. 제일 좋아요. 흐흐”
“뭐야, 지금 19금이야? 뭐야, 스?” 혜리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로 우리를 번갈아 쳐다본다. 나는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을 그녀와 효영이 사이에 놓으며,
“안돼, 야, 우리 혜리는 안돼.” 를 외쳤다.
“야, 혜리도 알건 알아, 그치?”
“응 나도 다 알아.”
태연하게 바닐라 팬케이크를 먹으며 말하는 민영이와 혜리. 그리고 우리 모두는 효영이를 쳐다봤다. 효영이가 혜리의 어깨를 살짝 토닥이며 말했다.
“언니, '스'로 끝나는걸 잘하는 남자를 만나세요.” 잠깐 갸우뚱하던 혜리,
“메스 싸이언스 뉴스 ? 뭐 그런 뇌섹남 얘기하는거야?”
이런, 순진한 물음을 던지다니.
역시 얜 안되겠다. 우리 셋은 서로에게 눈빛을 보냈다. “으음, 꼭 그건 아니지만…. 혜리 언니 보호 차원에서 이 정도로만 할게요.” 나와 민영이는 킥킥 거리며 괜히 얼음만 남은 아메리카노 잔에 빨대로 쉭쉭 거리며 헤집고 있었다. 효영이는 ‘이해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말을 이었다.
“언니 전에 제가 말했죠, 전에 그 꼬추 짝은애.”
나는 뿜었고, 민영이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우핫' 참으며 주변을 눌러보았다. “얘가 진짜,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사래에 걸려 켁켁 거리는 나를 토닥거리는 혜리. “와 진짜 넌 우리 중에 나이도 제일 어리면서 왜이렇게 아줌마 같아. 잠깐, 여기 한국 사람 없지?” 살짝 주위를 둘러본 민영이가 다시 나직히 말을 잇는다. “그 때 그 엔지니어? 그 사람?”
“아뇨, 그 오빠는 초식남이었구요, 그 전에 E사 다니는 그 사람요. 진짜 완전.”
“왜?” 혜리도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진짜 완전, 그냥 무브먼트였어요.”
초토화된 나와 민영이 사이에서 혜리도 멋적게 웃는다. “야, 혜리 얘도 아네. 와, 누가 우리 혜리를 이렇게 만들었어!” 민영이가 소리치자, 혜리는 못 들은 척 효영이에게 말했다. “난 그래도 그 때 그 엔지니어가 효영이한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효영이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커피를 쭉 들이 마시며 담담히 말한다.
“언니, 그 오빠는 토끼었어요.”
“토끼띠면 스더랑 민영이랑 갑이네, 4살차이 아니야?”
그러자 효영이는 나직히, 여전히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순진하고 말랑말랑한 표정을 짓는 여린 혜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언니 그게 아니라....”
효영이는 자신이 마시던 아메리카노 잔에 담겨진 빨대를 구부리며 말을 이었다.
“히잉.....” 이렇다구요.
2차 초토화.
민영이는 웃는 그 와중에도 손으로 미간을 부여 잡으며 소파 위로 쓰러졌고, 나는 얼굴이 도저히 화끈거려 안 그래도 바닥난 아메리카노 잔의 얼음 조각까지 입으로 털어 넣었다. 정말 효영이, 이 아이는 참 신기한 아이다. 어릴 때부터 천사소녀 네티 뿐만이 아니라, 운동회에서 둘리 비눗방울송에 맞추어 율동을 할 때에도, “쏘옥쏙쏙~ 빙글빙글~ 여기저기 내 방울~” 이 울려 퍼질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고. 손오공의 여의봉에서도 자꾸 19금 상상을 했다는 이 아이.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나 타고날 수 있을까.
“내가 효영이 진작에 알아봤어.” 웃음이 겨우 진정이 되고, 몇 조각 남지 않은 바닐라 케이크를 다시 집으며 “그래서 지금은 다 맞아?” 라고 이어 물어보니, 효영이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언니, 근데 아무래도 사랑이라는 건, 그 모든 것이 어울러져야 되는 것 같아요. 그 뒤에 안아주는 느낌이라던지, 팔배개가 블록같이 딱 나랑 맞는다라던지, 안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의 체취라던지, 그리고 같이 잠이 드는데 내가 숙면을 잘 수 있다 라던지, 이런 느낌인거죠.”
“그치.” 민영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었다. “근데 남자들은 잘 몰라.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휑하고 씻으러 가는 놈도 있고. 바로 담배 피는 놈도 있고..” 이제껏 잠잠하던 혜리는 “와, 뭐 그런 놈들이 있어?” 라고 화를 내자, 효영이가 혜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고, 언니, 의외로 많아요. 우리 혜리 언니는 진짜 진짜 좋은 사람 만나야 할텐데..” 민영이 역시 혜리를 보며 말했다. “혜리야, 근데 진짜 어려워. 나 있지, 대학 선배 중에 2년동안 연애하고 결혼한 선배가 있는데, 연애하는 동안 남자가 손만 잡더래. 그래서 아, 이 남자가 나를 아껴주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믿음이 가서 결혼을 하고 신혼 여행을 갔는데, 첫 날밤에 씻고 나왔더니 채찍을 들고 있었다는 거야. 엉엉 울면서 옷도 잘 못 챙겨 입고 그대로 도망 나왔대.”
“헐.” “소오름.”
나와 효영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혜리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말한다. “어떡해…”벌써 그렁그렁한 눈의 혜리를 내가 토닥이며, “진짜 혜리는 남자 생기면 우리한테 꼭 보여줘.” 라고 말하자, 민영이가 받아 친다. “야, 너나 잘해. 우린 니가 제일 걱정이야. 블로그에 이론만 잘 쓰면 뭐해, 너야말로 완전 병신 퍼레이드야.”
내가 뜨끔하여 말을 못 잇고 애꿎은 크림만 포크로 퍼먹으니, 혜리가 자기 접시에 담긴 팬케이크를 나눠준다. 효영이가 해맑게 말한다.
“언니, 배고파요. 우리 옆에 카멜 가서 맥주 한 잔?” “그러게, 배가 고프네.” 내가 한 쪽 옆에 잔뜩 쌓여진 접시들을 쳐다보며 말하자, “야, 너네 만나고 다음 날엔 엄청 뛰어야 해.” 하며 민영이가 투덜거린다. “어차피 먹을거면서.” 혜리가 민영이의 가방을 챙기며 일어난다.
아직 끝나지 않은 토요일의 브런치,
4시간의 수다,
그러나 여자들은 아직 배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