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위챗 모멘트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토끼 작가 김한나의 작품 사진을 여럿 올렸다.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진동이 울린다.
“괜찮아?”
혜리다.
“어, 어떻게 알았어?”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반갑게 전화를 받으려 했지만, 괜찮냐는 질문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야, 너는 뭔 일 있을 때마다 토끼 사진 올리잖아.”
눈물이 나는 그 와중에도, 어쩜 이리도 이런 나를 잘 알까. 라는 생각에 민망하기도, 고맙기도 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 스더 안 괜찮네. 내일 만나자. 알았지? 너 우선 푹 자.”
수화기 너머로 허허, 훌쩍 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혜리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혜리는 이윽고 우리의 단톡방에 ‘내일 우리 보자.’ 라고 메시지를 보냈을 뿐인데, 곧 이어 민영이가 단톡방 이름을 바꾸어버렸다.
경) 스더 독립 기념일 (축
아직 눈물이 얼굴에 범벅이 된 채로, 소리 내어 웃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라는 메시지를 띄우자, 효영이도 이런 짤을 보낸다.
민영 : 스더야 내일 우리 클럽갈까?
효영 : 우리 스더 언니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혜리 : 스더야 우리 오랜만에 소주 먹을까?
연달아 오는 그녀들의 메시지에 이상하게 더욱 눈물이 났다.
너무 고마워서…
‘그래ㅋㅋㅋㅋㅋ 홍췐루 서울포차 소주 콜ㅋㅋㅋ 모두 간을 깨끗하게 하고 오세요.^^^’.
억지로라도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 정도의 싱거운 이야기에도 여전히 웃음이 나는걸 보니.
***
자야지… 자야지… 뒤척이다 보니 커튼 사이로 해가 비춰온다.
‘오늘 아무 스케줄도 없는 토요일이라 천만 다행이다..’ 그렇게 또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쾅쾅 치는 소리에,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베베와 함께 놀라 벌떡 일어나 곧장 현관문으로 달려가 “谁?(누구세요?)” 라고 외치니, “是外卖!是韩女士?“ (배달이요! 아가씨 성이 한씨 맞죠?)” 라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쩌렁쩌렁 울린다. 비몽사몽 얼떨결에 문을 열었는데, 어떤 모자를 쓴 아저씨가 내 손에 하얀 봉지를 쉭 하고 건네 주었다. “谁送的呀?(누가 보낸거에요?)”라고 외쳤지만, 아저씨는 이미 쿨하게 사라진 뒤였다.
‘뭐지?’ 묶여있는 하얀 봉지 사이로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져 나오자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핸드폰을 눌러보아서야 벌써 오후 3시가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함께 확인한 혜리의 메시지. ‘너 이따가 올 때까지 아무 것도 안 먹고 있을 것 같아서 밥 보내.’ 또 눈물부터 난다. ‘응, 잘 먹을게, 고마워.’ 라고 답을 한 뒤, 봉지를 풀어보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도시락이다. 제육볶음.
아무 생각 없이, 아니, 혜리를 생각하며 천천히 밥을 씹어 삼켰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나를 보듬어주었다. 물론 우리의 연습 시간에 수도 없이 지각하고, 나보다도 덜렁거려 이리저리 손이 많이 가긴 해도, 그녀 특유의 말랑말랑한 목소리와 눈빛, 진심을 다해 매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무엇이든 사랑하는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글거리지만 밥을 먹다가 ‘혜리야 사랑해.’ 라고 메세지를 보내니, ‘나도^^ 이따가 봐’ 라는 답이 온다.
얼굴에 묻은 눈물 자국을 씻어 보아도, 팅팅 부어있는 눈은 감출 수가 없다. 샤워 물줄기를 맞으면서도 울고, 얼굴에 크림을 찍어 바르면서도 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려고 일부러 파란색 달라붙는 나시 원피스를 꺼내 입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자 ‘치마가 짧다.’ 라는 그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했다.
다시 다른 옷을 고르며 나는 또 울고 있다. 서른 살의 연애가 아무리 덤덤하게 끝난다 해도,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
그녀들을 만나러 가는 10호선 안에서, ‘어디야?’ 단톡방에 남겨진 민영이의 메시지에 ‘가고 있어. 8시쯤 도착 예정.’이라고 대충 답을 한 뒤, 얼마 전에 꾸욱 저장한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몇 번이나 되뇌어 읽어보았다.
‘인연이 아니라면, 그래 인연이 아니라면..’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주책 맞게 또 눈물이 난다. 하품 하는 척, 얼른 다른 생각을 하며 –다행히- 마스카라 번짐 테러 참사를 막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감정을 참으며 롱바이신촌 역에서 내리는데, 저 쪽 칸에서 내리는 효영이가 “언니!!” 라고 소리친다. 그녀는 나를 보고 달려와서는 곧 장 내 팔짱이 아닌, 손을 잡았다.
“언니, 우리 가요! 오늘 술 진탕 마셔요!”
그녀는 홍췐루로 향하는 그 길 내내, 날씨에 대해서, 이번 여름 휴가 때 레쉬가드를 입어야 할지 혹은 비키니를 입어야 할지, 휴가 눈치를 주었던 직장 상사에 대해서, 그리고 꼴 보기 싫은 어느 개념 없는 인턴 여자 애까지 그렇게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같이 걷는 그 길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채웠다.
징팅티엔띠 엘리베이터의 3층을 누르며 “효영아, 나 괜찮아.” 라고 말하니, “알아요 언니, 그러니까 우리 오늘 진탕 마시자구요.” 하며 씨익 웃는다. 서울포차로 들어서니, 자물쇠가 많이 걸려있는 저 쪽 구석에 미리 앉아있는 민영이가 손을 흔들며 “여기야!”라고 외친다. 그녀는 이미 뚝배기 떡볶이와, 배부르지 않는 숙주나물 볶음, 홍합탕을 시켜놓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우리가 앉자마자 앞에 놓여있는 소주병을 팔꿈치로 탁탁 치더니 익숙하게 두 바퀴 반을 돌려 딴 뒤, 가지런히 모여있는 세 잔의 소주잔을 가득 채우고는 그 중 하나를 나에게 건네준다.
“스더야, 드디어 독립이네. 첫 잔 원 샷!”
우리는 함께 짠!을 외친 뒤, 한 입에 털어놓았다. 내가 “크흑, 그 쓴 한라산이 오늘따라 다네.” 라고 말하자, “그러게요.” 라고 효영이가 맞장구를 쳐준다. 민영이는 “야, 너 근데 옷이 아직 왜 이래. 나는 너 오늘 붙는 원피스 입고 올 줄 알았는데.” 나는 빈 소주잔을 다시 민영이가 들고 있는 소주 앞에 들이밀며 대답 대신 노래를 불렀다. “습관이란게 무서운 거더군, 아무 생각 없이 또~” 라고 흥얼거리자, “야, 이제 너 해방이야. 그 동안 어떻게 참았냐 진짜.” 하며 또 가득 따라준다.
그렇게 한 병을 뚝딱 비운 후, 종업원이 버너를 가져와 불을 붙인 뒤, 다른 소주 한 병과 함께 “홍합탕 나왔습니다.” 라고 말할 때, 혜리가 왔다. 혜리는 나를 보자마자 내 등을 두어 번 쓰다듬고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민영이는 “혜리야, 스더 옷 봐봐.” 라며 혜리의 잔을 채운다. “아냐, 스더는 이런 옷도 생각보다 잘 어울려.” 혜리는 잠깐 나를 흘끔거리며 한 입에 소주를 털어놓는다. 내가 멋쩍게 웃는 사이, 이번에는 효영이가 넉 잔의 빈 소주잔을 채우며 말한다. “나는 스더 언니가 이렇게 변할지 몰랐어요. 그 것도 이렇게나 오래.” 민영이는 배부르지 않는 숙주나물 볶음을 젓가락으로 휙 휘저으며 “일년 넘었지?” 라며 무심하게 내뱉었다. “어, 그러게, 안 그래도 오늘 그 파란 나시 원피스 입으려고 했는데, 거울에서 ‘치마 짧아.’ 라고 음성 지원이 되더라. 참 신기해.” 효영이가 채워둔 소주잔을 또 한번에 털어놓는데, 이번에는 눈물이 핑 고인다. “야, 너 천천히 마셔!” 혜리가 내 물잔을 채워주며 말하자, 효영이가 다시 나의 빈 잔을 채워주며 “언니, 괜찮아요. 이럴 때 마시지 언제 또 소주를 이렇게 마시겠어요.” 라고 말하자, 민영이도 함께 ‘짠’을 외치며 거든다.
“뭐, 그렇게 노력했는데, 내가 너무 아프면 인연이 아닌 거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두 병째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직접 내 소주잔에 기울이자, 민영이가 “한 병 더 주세요!” 라고 외친다. 맞은 편에 앉은 혜리가 갑자기 내 손을 턱 잡더니, “스더야, 나는 너 편이야.” 벌써 몽롱하고 촉촉한 눈빛으로 나에게 나직하게 말한다. 그녀는 이미 취한 것 같다. 또 다른 소주를 가져온 종업원에게 내가 조용히 “여기 맥주랑 맥주잔도 주세요!” 라고 말한 뒤, 혜리에게 “알아 알아, 넌 맥주 마셔.” 라고 말하니, “아냐, 나 쏘주…. 아니… 나 쏘맥 마실래, 히이.” 실없는 그녀의 웃음과 함께 아까 고였던 눈물이 이제서야 뚝 떨어지는데, 나도 민망해서 실없는 웃음이 났다.
“야, 근데 아까 효영이가 얘네 회사에 개념 없는 인턴 이야기 하던데, 진짜 골 때린다.” 내가 화제를 돌리며 잔을 채우니, 효영이는 내 눈물을 못본 척 내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며 그 다음 말을 이었다. “언니, 있잖아요. 딱 우리가 싫어하는 부류.” 역시나 유쾌한 스토리텔러 답게 실감나는 흉내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효영이 회사의 인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 같이 깔깔 웃으며 우리는 그렇게 또 싱거운 여자들의 수다를 채우다가 집에 돌아왔다.
***
술을 많이 마셨는데 이상하게 취하지는 않았다. 피곤할 뿐이다.
‘다들 잘 들어갔니?’라는 민영이의 메시지에 ‘응, 나 씻고 누웠어.’ 라고 답하고, 그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나는, 서른이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이 정도 아픈 것은 참을 줄도 알고, 이 정도는 그냥 덤덤히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그냥 어른들은 ‘그런 척’ 하는 거였다. 나도 어느 새 조금씩 미소를 잃어버리고, 바쁘고 쫓기며, 짜증이 늘어가며 평범하고 멋없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몸부림치며 고민하고 살았다는 것. 서른인 지금도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 했다는 것.
서로 싫어서 딱히 헤어진건 아니었지만,
세상엔 그런 이별도 있으니까…
그래, 난 이렇게 또 세상을 알아간다 치자.
***
잠이 오질 않아 가사를 끄적여본다.
아픈 마음
그 마음 아나요
가슴이 메인다는 것,
밥을 먹어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그 맛있던게 맛이 없어요
바쁜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저며와 눈물을 꾹 참고 있다가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소리 없이 몰래 눈물을 흘리죠
그래도 아직 참고 또 참고 있다가
집에서 마주하는 밥 먹으라는 엄마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안고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엉엉 울죠.
그렇게 울다가 하루를 보내죠.
아픈 마음, 아나요
차라리 미우면 좋은데.
당신이 남긴 예쁜 말이,
당신과 걸었던 그 길의 풍경이,
당신과 함께했던 여름의 공기가.
나를 스칠 때 마다,
나는 이렇게 아플 수 밖에 없네요.
그대로 채웠던 내 마음을 찢어,
당신을 억지로 내보내야 하는 이 마음,
이 아픈 마음.
시간이 지나면 물론 아물겠지만.
나는,
그래요.
이 아픈 마음을 담담히 견디며,
당신을 보낼래요.
***
다행이다,
그녀들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