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쉬는 것에 대한 깨달음
TGIH, Thank God It's Holiday! 12월 24일부터 1월 1일까지 TGIH로 지정합니다. 공식적인 미팅은 없으며, 가족과 함께하는 휴가를 권장합니다.
이번 연휴에 푹 쉬고 오라는 회사의 지침이었다.
업무에 지칠 대로 지친 직원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연말 선물은 없었다.
회사 서비스 특성상 연말에는 비교적 바쁘지 않은 편인데, 정말 감사하게도 우리 회사는 직원들에게 이 기회를 잘 활용해서 꼭 쉬고 재충전을 하라고 TGIH라는 휴가 기간을 별도로 지정한 것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지만 경영진의 이런 마인드는 정말 존경스럽고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이 감사한 기간을 잘 활용해서 푹 쉬었을까?
12월 말, 나는 나의 2020년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어떤 1년을 보냈는지 월별로 쭉 적어봤고, 그것을 각 분기별로도 요약해봤다.
1분기는 코로나 속 세계여행을 마치고 귀국, 2분기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앞으로의 고민과 새 출발, 그리고 3,4분기는 웃프게도 업무와 사이드잡에 몰두하여 거의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사실 지금 회사 일을 시작한 후 90% 이상은 재택근무로 업무를 하고 있어서 눈을 뜸과 동시에 업무가 시작되고 잠이 들기까지, 아니 가끔은 잠들고 나서 꿈에서도 일을 하기 일쑤였다. 나의 정신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매일 느끼면서도 내 머릿속은 온통 회사 업무로 가득 차 있었다. 꼭 재택근무를 탓할 수는 없지만. 평소에 일하다 가끔은 정말 번아웃이 올 것 같아 근교로 훌쩍 떠났다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 마저도 충분하지 않았는지 연말이 되면서 제대로 된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확 들던 참이었다.
작년 중도 입사자여서 쓸 수 있는 휴가 일수도 많지 않았는데, 그것 조차 남아서 회사가 지정해준 12월 24일보다 조금 더 일찍 휴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12월 18일까지 업무를 하고 12월 21일부터 약 2주 동안 푹 쉬고 나서 1월 초에 복귀하는 일정으로 미리 휴가 신청도 해두었다.
그리고 12월 18일 오후, 할 일 리스트를 보니 아직 처리하지 못한 업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수인계하고 그냥 떠나버리기엔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었다.
결국, 21일까지 업무를 하루 더 하고 22일부터 쉬기로 했다.
회사에서 쉬라고 휴가를 줘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일까?
12월 21일, 퇴근 후 내 휴대폰에서 슬랙을 바로 삭제했다.
평소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알람을 끈 후 바로 슬랙 메시지들을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나 스스로를 너무 잘 알기에, 모바일 기기에서 슬랙 어플을 삭제한 것은 연휴 내내 회사 업무에서 최대한 멀어지겠다는 나의 엄청난 의지가 들어간 행동이었다.
그리고 12월 22일.
정말 어이없게도 휴가 첫날부터 새벽 4시 반에 눈이 떠졌고 그 후로 결국 다시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내년에 다시 열심히 일하기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인데, 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러자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업무 때문에 미뤄뒀던 일들이 생각났다.
예를 들면, 코딩 수업 완강하기, 자기 계발 책 읽기, 온라인 강의 듣기.. 뭐 이런 업무와 관련된 것들 말이다.
커피를 내려 평소와 같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나온 코딩 수업을 듣기 시작해 그 자리에서 완강을 했다.
'그래, 평소에 회사 업무 때문에 미뤄왔던 건데 다 끝내고 나니 기분이 좋네.'
이상한 건 나는 분명 휴가 중인데 더 피로가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코딩 수업 때문에 컴퓨터에 접속하자 자연스레 슬렉과 이메일을 확인하고 업무를 살펴봤다.
아..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렇게 나는 어느 순간, 나 스스로를 위해 온전히 쉬는 게 어색해진 사람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휴가가 끝나고 회사에 돌아갔을 때 업무를 더 잘하기 위해 쉬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니, 쉬는 기간 동안에도 나를 발전시키는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쉬려니, '휴식' 조차도 '업무를 잘하기 위해 해야 하는 하나의 일'이 되어버린 것다.
더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를 위해 온전히 '쉼'을 누릴 수 있기까지 꼬박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남편도 나에게 "이제 회사나 업무 얘기 안 하네?" 라며 놀라워했다. 조금씩 '회사 업무'나 '해야 할 일' 등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흘러가는 대로 하루를 보냈다.
구글 캘린더를 확인하지 않고도 하루가 지나가는 것에 익숙해지고, 아무 목적 없이 누워서 넷플릭스 시리즈 하나를 정주행 하기도 하고, 자기 계발 책이 아닌 소설책을 읽었다. 평소에 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안부를 묻고, 산 한가운데 있는 독채를 빌려 남편과 함께 강아지를 데리고 산속을 걸었다. 미팅과 미팅 사이에 있는 점심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해 먹고, 새로운 동네를 둘러보고 곧 이사 갈 집을 계약했고, 부모님과 코로나가 끝나면 함께 또 여행을 가자며 모임 통장을 새로 개설했다.
내일이면 다시 회사에 복귀한다.
회사에서 TGIH를 처음 의도한 것처럼 푹 쉬며 재충전을 했는지, 다시 일할 준비가 되었는지 누군가 질문한다면 나는 한치 망설임도 없이 "Yes"라고 대답할 수 있다. 물론 회사 업무와 관련된 자기 계발을 했을 때보다 관련 지식에 있어 조금은 뒤쳐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쉼'은 정말 온전히 '내 몸과 마음을 어떠한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행동'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 그래도 돼'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계속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제서라도 그 방법을 다시 터득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늘 남은 시간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와인 한잔 마시고 일찍 잠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