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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Dec 15. 2023

예술적으로 걸어볼까

인천 동구 만석동 '예술로 동구길'

'놈'들의 이야기




역사는 기록과 이야기(전설, 설화 등)를 남긴다. 


문자를 가진 ‘분’들은 기록을 남겼고, 문자를 갖지 못한 ‘놈’들은 이야기로 악착같이 자신들의 역사를 전했다. 이야기는 오늘날 영화, 드라마, 소설, 웹툰으로 다양하게 탈바꿈했지만 여전히 평범한 사람들, ‘놈’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드러나지 않아 가만히 보아야 보이고, 가만히 들어야 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예술로 동구길 안내지도

화도진문화원에서 개발한 ‘예술로 동구길’을 걸었다. 이 길은 만석동 일대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가는 프로그램이다. 


만석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시작했다. 바다와 뭍이 밀고 당기며 만드는 만과 곶의 부드러운 해안선은 매립되어 반듯했다. 오래도록 풍성했다는 포구에 고깃배는 사라지고 매립지에 공장이 속속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일제강점기에는 군수물자가 전쟁터로 실려 나갔고, 산업화시대에는 수출품이 바다너머로 실려 나갔단다. 




예술 작품의 무대가 된 만석동




매립지 개발은 이 언덕의 무늬를 바꿔 놓았을 것이다. 이삿짐이라곤 한두 보퉁이밖에 없는 가뿐한 살림살이를 든 사람들이 아무도 살지 않는 땅, 버려진 이 언덕에 겨우 지붕만 얹은 집들을 지었을 것이다.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 언덕, 그 서남면 일대는 물매가 밋밋한 비탈을 감아 내리며, 거적문 토담집이 악착스럽게 닥지닥지 붙었다. ” - 현덕, <남생이>


호두형 항구는 북성포구일 것 같고 물매가 밋밋한 비탈은 북성동과 만석동 언덕을 이르는 것 같다. 빼곡한 토담집들이 들어선 만석동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골목을 마당으로 공유했을 것이다. 울도 담도 없이 어깨를 맞대고 기대며 살아가는 마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성동에서 만석동으로 이어지는 언덕에는 지금도 그런 마을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문학 최고의 작품 <남생이>가 탄생한 현장


동화작가 현덕이 쓴 <남생이>이는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현덕은 인천 동구에서 살았던 경험을 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이야기는 인천항과 일대 매립지 공장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빈민촌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노마의 아버지는 부두 하역 작업을 하다가 골병이 든다. 그러자 이웃집 할머니가 남생이를 가져다준다. 생명력이 강하고 오래 사는 남생이니까 병을 낫게 해 줄 것이란다. 기원마저도 누추할 수밖에 없었던 삶이었다. 그러나 이 가난한 기원마저 무너지고 노마네 아버지는 죽고 만다. 상주가 된 노마는 슬퍼하며 통곡하기는커녕 큰 나무에 오른다. 번번이 실패하던 높다란 나무 오르기를 그날따라 가뿐하게 성공한다. 참 철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노마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아득하게 깜깜한 앞날들 그렇지만 ‘능히 어른의 세계에 한몫 들 수 있’게 여봐란듯이 잘 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만석어린이공원의 노마 - 오종현작품


현덕이 쓴 <남생이>는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문학가 박태원은 '이러한 이가 이제껏 문단에 나오지 않고 그 해 평가들은 부질없이 문단이 침체하였으니 어쨌느니 그랬을 것인가 ‘라며 칭찬했다.  안회남은 '우리 조선문학을 송두리째 톡톡 털어놓아도 그중 남생이 일편이 우리의 전 문학적 수준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까지 했다. 


만석어린이공원에 가면 해맑게 웃고 있는 <남생이>의 주인공 노마를 만날 수 있다. 오색 조각으로 꾸며진 배는 노마가 올랐던 나무를 돛으로 하고 있다. 그 위에 노마가 환하게 웃고 있다. 암울했던 시대를 헤치고 나갔던 수많은 노마를 보는 것 같았다. 색색으로 빛났을 노마들의 꿈이 이루어졌기를 바라본다. 




모두의 아지트 만석동 정희네




<나의 아저씨>는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다. 특히 가슴을 울리는 대사가 깊은 감동을 주었다.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이것이었다. 


드라마에서 배우 유라가 자신을 괴롭혔던 전도유망했지만 망해버린 감독 기훈에게 말한다.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 박해영,  <나의 아저씨> 


드라마 속 주인공 ‘지안’은 이름처럼 편안함에 이르지 못한다. 엄마가 남긴 사채를 갚지 못해 날마다 맞고, 굶고, 장기요양이 필요한 할머니 병원비마저 감당해야 한다. 주변에는 벅찬 짐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주는 어른들만 있다. 그런 지안에게 ‘진짜 어른’이 나타났다. 할머니가 장기요양등급을 받을 수 있도록 정보를 알려주며 이런 거 알려주는 어른이 없었냐며 안타까워 한다. 지안을 괴롭히면 찾아가 대신 싸워준다. 좋은 어른, 좋은 인연이 되어준다.


번듯한 것이라곤 없어 보이는 망가진 것 같은 마을에 허름한 술집 정희네. 드라마 속 인물들은 각자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성실한 무기 징역수처럼 꾸역꾸역’ 하루를 버티다가 저녁이면 정희네로 모인다. 그들의 술자리와 이야기가 위로가 되었던 따뜻한 공간. 머쓱하고 쭈뼛거렸던 지안도 이곳에서 편안함에 이른다. 


모두의 아지트, 모두에게 위로가 됐던 따뜻했던 정희네


만석동에 가면 정희네가 있다. 정희네 앞에 섰다. 그러자 정희네 시그니처인 고양이가 이렇게 말해 주는 것만 같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시길,”


<나의 아저씨>을 쓴 작가 박해영은 백상예술대상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드라마가 종영된 지 4년이 지난 뒤 발간된 대본집도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이렇게 반갑게 환대한 이유는 뭘까?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돌아보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구원은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좋은 인연'과 '좋은 어른'들의 위로와 연대일 수밖에 없다는 공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모두가 지안, 편안함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며 드라마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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