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날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by 샤누자오사무

올해 추수감사절은 조용히 지나간다. 미국에 있지 않으니, 달력에 표시된 빨간 날도 아니고, 마트를 점령한 칠면조도 없고, 동네마다 장보러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도 없다. 회사도 평소처럼 돌아가고 있고, 뉴스에도 그다지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상점들에 걸린 블랙프라이데이 광고 몇 개, 그 뿐이다. 그래도 이상하게 몸은 그 공기를 기억하고 있어서, 저녁이 되자 괜히 휴대폰 시계를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지금쯤 뉴욕은 다들 모여서 밥 먹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실 미국에 있을 때도 추수감사절을 아주 성대하게 챙겼던 건 아니다. 그래도 분명히 휴일이 있었고, 사회 분위기가 그 방향으로 돌아갔다. 비행기 표가 비싸다, 공항이 지옥이다, 이런 불평이 나오면서도, 다들 어떻게든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막상 나에게 명절이란, 가족과 함께 지낸다기보다는 혼자 지내는 시간에 가까웠다. 유학생이라는 건, 달력 속 빨간 날을 조금 비켜 앉아서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였다.


그렇다고 한국식 명절이 마냥 그리운 것도 아니었다. 친척과 가족이 모여 밥을 먹고 안부를 나누는 일은, 따뜻함과 의무감이 동시에 섞인 행사였다. 가끔은 진심보다는 예의가 앞서고, 정겨움보다는 피로가 남았다. 이런 내가 명절의 의미를 말하는 건 조금 웃기지만, 적어도 이런 생각은 했다. 함께 있는 시간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혼자 있는 시간이라고 해서 꼭 외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


추수감사절 즈음이면 친구들이 모여서 프렌즈기빙이라는 이름으로 밥을 먹었다. 가족 대신, 지금 여기서 서로를 지탱해 주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자리. 같이 뭘 만들어 먹고, 좀 싱거운 농담을 나누고, 배를 두드리며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이게 어쩌면 가족보다 더 솔직한 관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다 문득, 그 자리에도 못 끼고 혼자 방에 있는 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같이 있으면 괜히 초라해지는 것 같고, 혼자 있으면 또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워지는 그런 날들.


함께 있으면 괴로워서 사람을 피한다. 대화가 길어지면 내 결점이 들킬 것 같고, 상대의 말들에 나도 모르게 상처를 입는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 또 외로워서, 갑자기 메시지를 보내고,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둘 다 힘든데,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그 사이에서, 함께함을 향한 목마름은 이상하리만큼 사라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해답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 결국 고립과 연결, 홀로와 함께 사이에서 균형을 다시 배우는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둘 다를 연습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잘 지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동시에, 건강하고 바람직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럴 때 비로소 혼자 있을 때는 편안하고, 함께 있을 때는 즐거운 삶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잘 지낼 줄 아는 사람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은, 사실 꽤 단순하다. 내 하루를 나 혼자 어떻게든 지탱해 본 사람만이, 누군가에게 매달리지 않고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 하루를 나 혼자 책임져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은, 관계가 생기면 그 사람에게 내 삶을 통째로 기대고 싶어진다. 그러면 금방 숨이 차고, 결국 서로를 질리게 만든다. 상대가 나를 떠나면 나도 같이 무너질 것 같아서, 관계가 상처와 불안의 덩어리가 된다.


반대로, 스스로 살아낸 시간이 있는 사람은 다르다. 월세를 내고, 장을 보고, 병원에 가고, 힘든 날에 나 자신을 어떻게든 달래 본 사람. 휴일에 혼자 밥을 차려 먹어본 적이 있는 사람. 망가진 날을 스스로 수습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누군가를 만날 때, 각자 자기 몫을 어느 정도는 들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전제로 만난다. 그 전제가 깔린 관계는, 당연히 훨씬 덜 흔들린다.


그렇다고 혼자만으로 나를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나에 대한 성찰을 하려면, 결국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혼자 있을 때만 나타나는 나가 있고, 함께 있을 때만 튀어나오는 내가 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예상치 못한 질투와 서운함과 열등감이 튀어 오르는 순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나의 얼굴도 있다. 그래서 사람을 피하면 편해지긴 하는데, 동시에 알 수 있는 나의 영역도 줄어든다. 관계는 불편하지만, 성찰의 거울이기도 하다.


문제는 여기서 욕심이 섞일 때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호의를 놓치기 싫어서 일단 관계부터 시작해 버린다. 아무나 나를 좋아해 주니까 만나는 건, 그 순간에는 위로가 되지만 나중에는 더 큰 공허를 남기곤 한다. 좋아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사람이 내 삶의 속도와 방향을 함께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 나도 그 사람의 외로움을 버거워하지 않고 옆에 서 있을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을 천천히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독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은, 이 시간을 버티는 힘이 있다. 외로움이 너무 무서운 사람은, 그 시간을 건너뛰고 싶어진다.


추수감사절 같은 날은, 이런 생각을 하기에 좋은 날이다. 가족과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친구들과 모여 시끌벅적하게 저녁을 먹을 수도 있고, 아무와도 약속이 없을 수도 있다. 어떤 형태든 괜찮다. 다만 중요한 건, 그날 저녁 혼자 방에 돌아왔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혼자라는 사실이 나를 완전히 부수지 않는가. 조용한 방 안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내 마음을 쓰다듬을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미 꽤 건강한 편일지도 모른다.


올해는 미국에 있지 않아서, 명절의 분위기가 훨씬 옅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그게 아쉽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이 느슨한 거리가 좋다. 의무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압박 없이, 내 선택으로 오늘을 어떻게 보낼지 정할 수 있다는 것. 조용히 밥을 먹을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 가볍게 안부를 물어볼 수도 있다. 꼭 둘 중 하나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혼자 잘 있을 줄 아는 사람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고독을 견디는 힘과 연결을 시도하는 용기가 동시에 필요하다. 어느 날은 혼자서 나를 잘 챙기는 연습을 하고, 어느 날은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을 보내는 연습을 한다. 그 사이에서 아주 조금씩, 혼자 있을 때는 편안하고, 함께 있을 때는 즐거운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지도 모른다.


오늘 같은 날, 멀리 떨어진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문득 마음이 가라앉는다면, 그 마음도 나쁘지 않다. 그 감정의 바닥까지 같이 내려가 보면서, 나는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숨이 편해졌었는지, 어떤 순간에 혼자인 내가 가장 괜찮았는지를 떠올려 본다. 그리고 다시, 내일의 나를 위해 작은 약속을 하나 한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혼자 잘 지내는 힘이든 좋은 관계를 고르는 눈이든, 결국 익숙해서 편한 것만 붙잡는 태도와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 같다. 사람도, 도시도, 일도 마찬가지다. 그냥 편해서 계속 보는 사람, 그냥 오래 알고 지내서 놓지 못하는 관계, 그냥 오래 다녀서 그만둘 생각을 안 하는 직장. 이런 것들은 겉으로 보기엔 안정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더 이상 자라게 하지 않는 껍데기가 되기도 한다.


고독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는 말은, 혼자 있어도 괜찮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나에게 맞지 않는 것들에서 조용히 걸어나올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새로운 친구, 새로운 일, 새로운 생활 방식은 처음엔 어색하고 낯설어서 불편하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 불편함을 통과해 봐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된다. 편해서 계속 붙잡는 것들과, 불편하지만 한 번쯤은 시도해 봐야 할 것들을 구분하는 감각. 아마 그 감각이 자라날수록,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함께 있을 때도, 좀 더 솔직한 얼굴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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