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비율이 몇 퍼센트인지 묻기 전에

다양성은 숫자가 아니라, 나와 너의 태도라는 이야기

by 샤누자오사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팀 런치를 했다. 영국식 크리스마스 디너라고 칠면조 로스트에 그레이비, 크랜베리, 스터핑을 먹었는데, 미국에서 추수감사절마다 보던 그 메뉴 그대로라 괜히 웃겼다. 땡스기빙이 이걸 베낀 건지, 둘이 사촌 관계인지 헷갈리는 맛. 점심을 먹고 시크릿 산타 선물도 주고받았다. 다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렸더니, 금세 메시지가 하나 왔다.


“회사에 백인밖에 없네?”


누가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과거에 했던 말들과 태도를 떠올려 보면, 그 한 줄에 실려 있는 의도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백인 많은 회사에서 일하는 나, 백인 틈에서 일하는 너. 그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꽤 중요한 정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사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영국에서는 나름 이름이 알려진 회사다. 국제적으로도 여러 나라에 진출해 있지만, 한국에서 누구나 아는 그런 이름은 아니다. 회사 안을 둘러보면 유색인종 비중이 확실히 낮다. 심지어 런던에서 나고 자란 현지인들조차 대부분 백인이다. 다양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외형적인 다양성은 제한적이다.


웃긴 건, 이 안에서 나는 오히려 미국 사람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업무도 그렇고, 회의 때도 그렇다. 이들에게 미국을 설명하고, 미국의 기준과 관행을 옮겨 오는 사람. 인종적으로 보면 나는 아시아인이지만, 역할만 놓고 보면 약간의 미국인 포지션에 서 있는 셈이다. 나를 한국인, 아시안으로 보느냐, 미국 쪽 사람으로 보느냐보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진 한 장에 백인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영국은 이민자가 많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미국만큼 다양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직장 안으로 들어가면 더 그렇다. 적어도 내가 있는 곳에서는 다양성 자체를 이야기할 겨를이 별로 없다. 사람들은 일하느라 바쁘고, 회사의 성장과 자기 생존이 우선이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내 사진을 보고 백인이 많다고 말하면, 그 말이 현실을 정확히 짚은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허전하다. 내가 누구와 함께 일하는지보다, 누구 사이에 끼어 있는지가 중요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일하는 곳은, 다양성이 숫자상으로도 실제 감각으로도 부족하다. 여러 색이 섞여 있기 전에, 일단 흰색이 기본값으로 깔려 있는 느낌. 다름을 존중한다는 말보다, 아직 다름이 충분히 등장하지 못한 구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다양성으로만 따지면, 뉴욕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어느 나라 출신을 만나도 이상하지 않은 도시. 회사도 그랬다.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곳에서도, 비교적 작은 회사에서도 일해봤지만, 항상 백인들 틈에서 일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대신 그 다양성 속에서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점, 한국어를 한다는 점, 한국에서 자랐다는 점이 더 또렷하게 부각되곤 했다. 유색인종 안에서도 계속 세분되는 정체성들. 그런데 그때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백인 비율이 어떻게 되냐고. 다양한 곳이라서 다행이라는 뉘앙스도 있었지만, 어딘가에서 흘러드는 시선은 비슷했다. 어떤 사람들이 묻는 건 늘 그 질문이었다.


왜 누군가에게는 회사에 백인 동료가 많은 것이 중요할까. 현지 출신 유색인종, 이민 2세, 다른 배경의 동료들이 함께 있는 풍경보다, 백인 다수가 버티고 있는 장면이 더 성공처럼 느껴지는 걸까. 작은 현지 스타트업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보다, 이름난 한국 기업의 해외 지사에서 일하는 것이 더 값진 이력처럼 여겨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회사 자체가 무엇을 하는 조직인지보다, 한국 사람이 한 번쯤 들어본 회사이냐가 우선순위가 되는 경우.


구글 출신이다, 메타 출신이다 하는 말이 한국에서 유난히 잘 먹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대단한 회사에서 일하는 경험이 실력의 증거가 되는 건 맞다. 다만 그 이름이 포장지로만 소비될 때는 조금 씁쓸하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사라지고, 어느 로고 아래에 있었는지만 기억된다. 해외에서 살다 돌아온 사람도 비슷하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든, 결국 남는 건 어느 도시 출신이냐는 포장지다. 뉴욕, 런던, 베를린, 도쿄 같은 이름이 먼저 떠오르고, 사람의 이야기는 나중에 붙는다. 질문하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그 편이 편하니 그렇게 굳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삶을 이해할 때도, 제일 먼저 겉 포장만 확인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백인 비율, 회사 이름, 도시 이름 같은 것들. 이 정보들만으로 상대의 사회적 위치와 능력, 삶의 질까지 한꺼번에 가늠하려 한다. 그게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정 부분은 실제를 반영하기도 하니까. 문제는 그걸로 다 안다고 믿는 태도다. 그렇게 쉬운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면, 생각은 편해지지만 시야는 점점 좁아진다.


이제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다양성이 진짜로 중요한 건, 터무니없이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배경으로 깔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 다른 사람들이 안전하게 자기 얘기를 꺼낼 수 있는가의 문제에 가깝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회사 이름과 동료의 인종 구성을 먼저 묻는 세계에서는, 나라는 사람의 서사가 계속해서 압축되고 단순화된다. 어느 회사 출신, 어느 도시 출신, 어느 인종 사이에 낀 사람. 편리한 분류지만, 그 안에 담기지 않는 부분이 훨씬 많다. 결국 내가 버티고 있는 시간, 내가 쓰는 언어,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태도가 나를 만든다.


백인 비율이 몇 퍼센트인지보다, 이 팀에서 내가 편하게 웃을 수 있는지, 실수했을 때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지, 내가 한국인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나라서 존중받고 있는지. 실제로는 그런 것들이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준다. 나는 여기서 어떤 얼굴로 일하고 있는지, 어떤 농담에 웃고, 어떤 순간에 침묵하는지, 나에게 중요한 질문은 그쪽에 가깝다.


어디에서 일하든, 누구와 함께 있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 삶의 내용을 채우는 건 회사 이름도, 팀의 인종 비율도 아니다. 매일의 일을 대하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나를 설명하는 단어를 내가 어떻게 선택하느냐다. 그 기준이 조금 단단해지면, 백인 비율이 몇 퍼센트인지, 회사가 얼마나 유명한지 같은 질문은 점점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대신 이런 질문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누군가가 내 사진을 보고 이렇게 물어봤으면 좋겠다.

“거기 사람들은 어때? 너는 거기서 어떤 표정으로 일하고 있어?”


백인이 몇 명인지 세어 보는 대신, 그런 질문들이 더 자연스러운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다양성은 숫자가 아니라 태도라는 말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중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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