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집에서 다시 집을 배우는 일
해외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이 힘들다고 토로하는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누리던 것들이 사라졌기 때문인 것 같다. 원래 살던 도시, 원래 다니던 가게, 원래 쓰던 언어와 거리의 소음들. 그래서 우리는 습관처럼 환율을 두드려 보고, 새로 사는 도시의 물가를 예전 집과 비교한다. 같은 커피 한 잔도, 같은 월세도,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원화나 달러로 환산된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는 그들만의 규칙과 리듬이 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일상을 잘 이어가고 있는데, 나는 자꾸만 예전 집을 기준으로 삼는다. 생각하지 않아도 당연히 제공되던 것들이 있던 곳, 그래서 그곳을 집이라고 믿어버린 시간들.
어쩌면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제공되는 것들이 있는 곳을 집이라고 착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수도가 언제나 잘 나오고, 배달이 당연하고, 필요한 만큼의 편의가 별 고민 없이 손 닿는 거리에 있는 곳. 불편함에 대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래서 떠나온 곳이 늘 집보다 못한 것처럼 보이고, 조금만 불편해도 금세 향수가 덮쳐 온다. 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편안함 뒤에도 누군가의 수고와 시간이 깔려 있다. 내 몸 하나 건사하는 데만 해도 품이 많이 든다는 걸, 타지에 나와 살면서 더 분명히 알게 된다.
집에서 밥 한 끼를 해 먹으려면, 장을 봐야 하고, 재료를 손질해야 하고,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쓰레기는 끝도 없이 나오고, 환기도 시켜야 하고, 빨래도 샤워도 청소도 전부 손이 간다. 예전에는 그냥 굴러가던 일들이, 여기서는 죄다 나의 몫이 된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위로나 자기 연민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괜찮다고, 안 해도 된다고, 오늘은 그냥 누워 있으라고 토닥이는 말도 필요하지만, 그 말만 반복한다고 해서 삶이 돌아가지는 않는다. 결국 누군가는 이 집을 돌봐야 하고, 그 누군가는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이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사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삶에 들어가는 품을 인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괜히 거창하게 의미 부여하지도, 반대로 전부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지도 않고, 그저 당연한 몫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내가 사는 곳이 집이 되어야지, 익숙한 집으로만 돌아가려는 마음으로는 어디서도 완전히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사실. 아무리 짧게 머물다 갈지라도,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임시 숙소가 아니라 잠시 맡은 집이라고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이 없으면, 삶은 불안하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부족함을 견디는 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족함은 단순한 가난이나 물건의 부족이 아니다. 원하던 것을 가지지 못한 기억, 매달 불안한 통장 잔고, 수고에 비해 인정받지 못한 시간, 낯선 도시에서 혼자 견디는 밤, 불확실한 미래를 마주하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넓은 의미의 결핍이다. 해외생활은 이런 부족함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장치 같기도 하다.
결핍을 견딘다는 건, 아무 말 없이 버티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부족함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연습에 가깝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다정함, 선의와 애정, 기회와 돈, 꿈을 알아서 쥐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나를 쉬이 넘기지 않겠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빈손인 채로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연습, 아무것도 완벽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도 나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 존재의 기초 체력을 길러야한다.
그래서 결핍을 일부러 찾아 나설 필요는 없지만, 피하기만 해서는 자라날 수 없다. 해외에 나오는 선택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해외생활이 사치처럼, 특권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편한 곳으로 돌아가 문화적 경험만 기념품처럼 챙겨가는 모습이 겹쳐 보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익숙함 밖으로 한 번쯤 걸어 나와 보고, 낯선 부족함 사이에서 자기만의 균형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전에 한 유명인과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외국에서 이등 시민 취급받는 느낌이 싫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익숙한 언어와 제도 안에서, 해외 이력까지 등에 업고 살아가는 편이 훨씬 덜 고단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자녀들을 해외 학교에 보내고, 집도 생활비도 넉넉히 뒷받침해준다. 그 아이들은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힘든 해외 생활 끝에 금의환향하는 삶을 택할까, 아니면 현지에 녹아들어 그곳의 삶을 자기 집으로 삼을까.
모두가 외국에 눌러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결국 돌아간다. 다만 나는 그 귀국의 이유가 무엇인지 자꾸 궁금해진다. 정말 집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적인 본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곳에서 집을 일구는 일이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마 둘 다 섞여 있을 것이다. 힘들어야만 의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편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 중간 어딘가, 적당한 부족함과 적당한 안정을 버텨내며 곧게 자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결핍과 익숙함 사이에서, 각자 자기만의 집을 천천히 만들어 가는 사람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