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ong side와 opposite 사이에서

세 나라 운전, 한 사람의 방향감각

by 샤누자오사무

운전면허 하나로도 인생이 꽤 우습게 꼬일 수 있다는 걸, 이렇게까지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꼬인 건 아니다. 한국 면허 교환이 안 되는 주에서 미국 면허를 다시 땄고, 그러는 사이 한국 면허는 조용히 만료됐다. 다시 살릴 수 있는 여건도, 신분도, 시간도 마땅치 않아서 그냥 그렇게 보내줬다. 그리고 이젠, 미국 면허는 또 영국에서 교환이 안 되는 바람에, 이번엔 영국에서 다시 면허를 따야 한다. 운전하는 자격만을 놓고 보면 한국, 미국, 영국 세 나라의 자격 시험을 다 치르는 셈이다. 같은 운전인데, 나라가 바뀔 때마다 시스템이 처음부터 리셋되는 느낌이 있다. 살기 좋은 글로벌 시대라면서, 정작 몸을 움직이는 기술 하나를 증명하는 방식은 여전히 국경에 갇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정작 나는 그냥 평범하게 어디 좀 다녀보고 싶은 사람일 뿐인데.


영국에서 운전을 배우려니, 일단 도로부터 반대다. 오른손으로 기어를 잡던 기억이 왼쪽으로 옮겨 붙고, 뒤를 볼 때 고개를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할지 순간적으로 헷갈린다. 도로 표지판도 비슷한 듯 다르고, 처음 보는 단어인데 어딘가 아는 뜻인 표지들이 줄줄이 나온다. 게다가 평생 익숙했던 driver’s license가 갑자기 driving licence가 되어 돌아온다. 스펠링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느낌은 꽤 다르다. 필기 시험 문제를 외우며, 반대편 운전대를 잡을 생각을 하니 설레면서도 묘하다. 마치 그동안 잠들어 있던 뇌의 반대편이 슬쩍 깨어나는 기분. 어렵다기보다, 오랜만에 새로운 회로가 만들어지는 감각이 있다. 이 나이에 이렇게 또 한번 머리를 굴려야 한다니, 약간은 귀찮고, 약간은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농담처럼 생각해 본다. 제임스 본드가 전 세계를 누비며 도로를 바꿔 타듯이, 나도 이제 어디서든 웬만하면 운전할 수 있는 몸이 되어 가는 건가하고. 영국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미국에서 운전하는 건 opposite side가 아니라 wrong side라고들 한다. 선을 그을 때도 그냥 반대가 아니라, 네가 틀렸고 우리가 맞다는 어감. 다른 나라에서는 opposite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던 터라, 이 작은 표현 차이에서 영국식 자존심이 슬쩍 드러난다. 사실 어느 쪽이 맞고 틀린지는 중요하지 않은데, 사람들은 방향조차도 자기 쪽이 기준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도로 위의 통행 방향은 다르지만, 서로가 바보가 아닌 이상 결국은 같은 규칙을 따르고, 같은 상식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잘 잊는다.


생각해 보면, 운전이라는 건 꽤 개인적인 기술이면서 동시에 가장 사회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도 차 없이 살아봤지만, 여행을 갈 때 마다 렌트를 해서 낯선 도시들을 달렸다. 다른 유럽 나라에서도, 도로 표지판을 더듬어 가며 운전해 다니는 게 좋았다. 영국 역시 철도가 닿지 않는 곳곳을 가려면, 언젠가는 차를 빌려 도로 위에 올라야 할 것이다. 나는 운전 자체를 좋아한다. 장거리, 장시간 운전은 미국에서 단련했고, 부산의 운전 문화와 산복도로는 거의 부트캠프 같은 하드 트레이닝이었다. 그 훈련을 통과한 시점부터, 어지간한 도시는 웬만하면 다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쯤 되면, 이제 남은 건 방향과 표지판을 새로 익히는 일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따지고 보면 방향을 바꿔 운전한다는 건 삶의 기준을 옮겨 보는 연습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인 것 같다. 평생 오른쪽으로 달리던 사람이 왼쪽 차선으로 들어가는 순간, 몸은 조금 불안해도 눈과 손은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려고 애쓴다. 한국, 미국, 영국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시험을 보고, 다른 용어로 시험지를 풀어보는 동안, 사실 가장 많이 달라지는 건 면허증이 아니라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도로가 바뀐다는 건, 나를 둘러싼 규범과 언어가 바뀐다는 뜻이고, 그 속에서 내가 가진 기술과 감각이 다시 정렬된다는 뜻이다.


영국에서 또 운전하면서 다닐 날들이 기대된다. 애스턴 마틴을 타고 스코틀랜드의 협곡을 질주하는 스카이폴의 한 장면처럼 근사하진 않더라도, 나만의 장면들은 분명 생길 것이다. 비 오는 날, 좁은 시골길을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밤이나, 해가 길어지는 여름날, 바닷가 마을로 향하는 오후 같은 것들. 어디에서 어떤 차를 몰든, 결국 중요한 건 방향을 잃지 않는 일일 것이다. wrong side와 opposite 사이에서, 오늘도 나는 나만의 방향감각을 조금씩 조정해 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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