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다시 나를 배우는 일

체념이 아니라 조금씩 넓어지는 쪽으로

by 샤누자오사무

체념의 문장은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어차피 이 나라에서는 내가 뭘 해도 안 통할 거다. 언어도 안 통하고, 제도도 불편하고, 사람들은 다들 자기들끼리 친해져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어차피 나는 여기서 이방인이라고 스스로에게 선을 긋는다. 어떻게 해도 안 맞는 행정, 미묘하게 불편한 서비스, 말이 비껴가는 순간들이 한 번씩 겹치면 그런 생각이 들 법하다. 그냥 포기하고 사는 거지, 싶어지는 날이 있다. 은행 업무 하나 보려 해도 낯설고, 병원 한 번 가려 해도 인터넷 검색을 몇 번씩 해야 하고, 장을 보는데도 가격이 체감이 안 된다. 그럴 때 사람은 지친다는 말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나만 고생하는 것 같고, 내가 온 선택이 틀린 것 같고,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편안해 보인다.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마음도 이해한다. 다만 그 문장으로 이 삶 전체를 정의해 버리기에는, 우리가 여기서 버티고 있는 마음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기준이 통하지 않는 순간을 매일 받아들이는 일이 쉬울리는 없다. 이 방식이 더 합리적인데, 왜 여기는 이렇게 할까 싶은 장면들이 쌓인다. 줄 서는 방식, 일 처리하는 속도, 휴일을 보내는 법, 말 한마디에 들어 있는 뉘앙스까지. 이럴 때 사람은 둘 중 하나를 택한다.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믿으며 더 단단하게 닫히거나, 내 기준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아주 조금씩 마음을 틔우거나.


서러운 날도 있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날도 있고, 말이 안 통해서 멍해지는 날도 있다. 실제로는 체념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을 수없이 지나가면서, 그 사이에서 이상한 단단함이 자란다. 전에 같으면 한 번에 무너졌을 감정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면서 어딘가 다르게 흘러간다. 화가 나기 전에 한숨을 한 번 더 쉬게 되고, 포기하기 전에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 뭔지 떠올려 본다. 내 안의 에너지가 줄어들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에너지가 자라는 시간일 수도 있다.


사실 모두가 늘 새로운 것에 적응할 에너지가 넘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잠깐 쓰레기 버리는 법 하나 바꾸는 것도 버겁다. 그래도 낯선 곳에 남아 산다는 건, 조금씩 그 에너지를 키우겠다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일에 가깝다.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어쨌든 어느 정도는 자신의 선택이 있었다. 공부를 위해서든, 일 때문이든, 가족을 따라온 것이든, 여러 사정이 뒤섞여 있겠지만, 적어도 한 번쯤 이곳을 향해 발을 옮긴 적이 있다. 그 선택에는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더 나은 기회에 대한 기대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 누리던 것들을 내려놓는 감각이다.


힘들고 지치는 건 당연하다. 다만 그 힘듦을 전부 이 도시 탓, 이 나라 탓으로 돌려 버리는 순간, 내가 사는 곳 전체가 통째로 지옥이 된다. 어디에 살든 마음속에서 먼저 지옥을 만들어 버리는 습관이 생기면, 다시 원래 집으로 돌아가도 비슷한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돌아가면 행복할 것 같지만, 막상 돌아가면 예전에 힘들어하던 기억들이 또 미화되어 떠오른다. 그때는 또 다른 천국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옥은 항상 낯선 모습만 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주 익숙한 집의 풍경을 하고, 예전에 살던 시간의 얼굴을 하고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어디든 백이면 백, 나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곳에서 살 수는 없다. 도시를 고를 때, 직장을 고를 때도, 배우자나 연인은 선택할 때도 결국 비슷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좋은 점이 아흔아홉 개여도, 내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 하나가 있으면 그곳에서 버티기 어렵다. 반대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꽤 있어도, 나에게 꼭 필요한 몇 가지가 채워지는 곳에서는 어떻게든 버티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건 완벽한 곳을 찾는 일이 아니라, 무엇까지는 감당할 수 있고 무엇은 도저히 안 되는지를 스스로 아는 일이다.


외국에서 산다는 건 그런 기준을 조금씩 다시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원래 살던 곳에서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을 새로 세기 시작한다. 나에게 꼭 필요한 편안함이 무엇인지, 어떤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는지, 어떤 관계가 나를 살리고 어떤 관계가 나를 소모시키는지. 중요한 건, 어딜 가든 언젠가 이런 균형을 다시 맞춰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있는 곳을 온통 지옥이라고만 부르기보다, 이곳에서 내가 견딜 수 있는 것과 도저히 못 견디는 것을 천천히 가려 보는 쪽이 조금 더 나를 살리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여전히 낯설고, 가끔은 서럽다. 그래도 그 속에서 자라는 어떤 단단함이 분명히 있다. 이 단단함을 믿는 쪽에 서보고 싶다. 여기가 영원한 집이 아닐 수도 있다. 언젠가는 다른 나라로, 다른 도시로, 혹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헛되지는 않다는 걸, 적어도 나 자신만큼은 알아봐 줬으면 한다.


외국에서 산다는 건 체념이 아니라, 체념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수도 없이 느끼면서도 결국 오늘 하루를 또 준비하는 일에 가깝다. 장을 보고, 언어를 배우고, 사람을 만나고, 서운함을 삼키고, 작은 기쁨을 발견하는 일들. 그 속에서 조금씩 나의 기준이 넓어진다. 이 넓어짐을 성장이라고 부르든, 단단해짐이라고 부르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사는 곳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조금은 불행함에서 멀어진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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