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서 밀려나 보는 연습

혼자서도 버거운 세계가 가르쳐 준 것들

by 샤누자오사무

한 나라 안에서만 오래 살다 보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착각하기 쉬운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부터 시스템이 익숙하고, 공공서비스를 어떻게 쓰는지 알고, 은행 앱도 눈 감고 누를 수 있을 만큼 손에 익어 있으면, 웬만한 일은 혼자 다 해내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계속 일이 꼬이고, 취업이 안 되고, 관계도 자꾸 어긋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유독 실패로만 가득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둘 다, 자기가 서 있는 땅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을 때 생기기 쉬운 착각인지도 모른다. 남의 나라에 가서 아주 단순한 일을 해보려 할 때 비로소 알게 된다. 폰 하나 개통하는 일도, 병원 예약을 잡는 일도, 서류 한 장을 제출하는 일도 혼자서는 잘 되지 않는 경험. 행정 업무를 누군가 대신 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때 깨닫는다. 누군가의 도움과 설명이 필요하다는 게, 내가 못나서가 아니었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저 그 사회의 언어와 구조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라는 것을.


이런 경험은 꼭 장기 유학이나 이민이 아니어도, 조금은 느껴 볼 수 있다. 여행을 가더라도 모든 것을 가이드나 지인이 해결해 주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 안내문을 읽고, 표를 끊고, 헷갈리는 양식을 눈 비벼 가며 채워 보는 쪽을 택해 볼 수도 있다. 반대로, 그런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는 환경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삼 알게 되기도 한다. 공지 하나, 안내 문자 하나만 읽어도 일이 진행되는 사회는, 보이지 않는 곳에 이미 많은 품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해외가 아니어도 비슷한 깨달음은 찾아온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 보는 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에서 새로 자리 잡아 보는 일. 그때 비로소, 늘 당연히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와 배려 위에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몸이 아픈 날, 대신 약을 사 오던 사람이 더 이상 곁에 없을 때,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약국까지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온다. 자취방 부엌 한쪽에서, 대충 끓인 국 한 그릇이 괜히 먹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한 그릇에 담긴 수고와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경험이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단지 돈 쓰고 다니면서 예쁜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멋진 사진을 남기는 것만이 경험은 아닐 것이다. 익숙함을 잠시 벗어나 보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에 기대고 살아왔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시간.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나누던 안부 인사 하나가, 특정 언어와 특정 맥락을 떠나자 갑자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리는 순간. 도움을 받아야 할 때 고맙다고 말하는 것조차 버거워지고, 억울하고 화나는 상황에서도 아무 말 못 하고 돌아서는 경험. 그런 순간들이 쌓일수록, 사람은 조금씩 겸허해진다.


외국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히는 차원이 아니다. 안내문과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어 보는 연습, 나와 다른 템포로 움직이는 행정과 업무에 적응해 보는 연습, 침대에서 울고 싶은 만큼 힘든 날에도 몸을 일으켜 필요한 일을 해내는 연습. 이런 것들이 결국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고, 동시에 다른 사람을 볼 때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돌이켜 보면, 그런 경험들이 더 인간적인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아는 사람들. 어떻게 살아도 빈틈과 실수가 남는다는 것을 알기에, 남의 실수 앞에서 쉽게 돌을 들지 않는 사람들. 일이 잘 풀렸을 때 자기 공로만 강조하기보다, 운과 타이밍과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줄 아는 사람들. 책임이 자기에게 있을 때 눈을 돌리지 않고, 어설퍼도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세상 전체가 갑자기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품고 있던 실망이 조금은 덜어지는 느낌이 든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큰 파도가 온다. 병, 상실, 실패, 관계의 붕괴 같은 이름으로. 어떤 사람은 그 파도에 휩쓸려 더 날카로워지고, 더 방어적으로 변한다. 세상을 먼저 공격해야만 버틸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 과정을 지나며 조금 더 부드러워진다. 상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덮어버리지 않고, 한 번쯤은 정면으로 바라본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어루만질 줄 아는 사람들은 대개 두 번째 길을 선택한 이들이다. 아픈 순간을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지 않았고, 그렇다고 전부 남 탓으로만 돌리며 그때의 자신을 버리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그 경험의 의미를 찾아보려 애쓴 사람들. 그래서 누군가가 아플 때, 그 아픔을 대신 해결해 줄 수는 없어도, 혼자 두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오히려 더 다정해지는 이유는, 그 상처를 통과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태도를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나를 더 대단해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한 인간으로 제자리 찾아 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내가 잘났던 순간에도, 못났다고 느꼈던 순간에도, 사실은 타인의 손길과 보이지 않는 구조 속에서 같이 떠밀려 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 그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남의 삶을 함부로 단정짓는 마음이 조금씩 줄어든다.


완벽한 사람을 꿈꾸기보다는, 완벽하지 않은 세계에서 조금 더 인간적인 태도를 배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 배움은 자격증으로 남지 않고, 일상에서 남는다. 낯선 곳에서 헤매던 날의 기억, 혼자 앓던 밤의 온도, 도와준 사람에게 제대로 고맙다 말하지 못했던 후회. 이런 것들이 쌓여, 언젠가 누군가의 버거운 하루 앞에서 조금은 더 천천히, 조금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줄 것이다. 그 정도면, 멀리 돌아온 경험치 치고 꽤 괜찮은 수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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