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을 숭배하는 시대에 생각과 실천을 되찾는 법
기술은 우리를 돕는다고 말하지만, 요즘의 도움은 너무 친절해서 문제다. 생각이 시작되기도 전에 요약이 결론을 내리고, 대화가 어색해질까 봐 입을 열기도 전에 이모지가 대신 말해준다. 길이 막힐까 봐 집을 나서기 전에 배달이 도착하고, 실패할까 봐 시도하기 전에 튜토리얼이 모든 변수를 제거한다. 우리는 마찰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무엇을 잃었는지는, 아직도 계산을 안 한다.
읽는 건 지루하고, 말 거는 건 어색하고, 움직이는 건 피곤하고, 집 밖은 부담스럽다. 생각은 원래 어렵다. 낯선 사람은 원래 무섭다. 예상치 못한 반응을 감당하는 건 귀찮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걸 제거한다. 손쉽게, 즉시, 거의 무료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이 편해질수록 마음은 더 예민해진다. 작은 불편에도 과민해지고, 작은 실패에도 부서지고, 작은 지루함에도 도망친다. 마찰을 없애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취약해진다. 인간이 약해진다.
마찰은 단지 불편이 아니다. 마찰은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생각이 깊어질 때 생기는 저항, 관계가 가까워질 때 생기는 어색함, 실천이 몸으로 행해질 때 생기는 삐걱거림, 이게 전부 마찰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마찰을 적으로 취급한다. 불편하면 나쁜 것, 느리면 틀린 것, 어렵다면 효율이 떨어지는 것. 그렇게 살다 보면 삶은 매끈해지지만, 인간은 얇아진다. 얇아진다는 건 감정이 섬세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포기한다는 뜻이다.
기술은 돈이 된다. 마찰을 제거하면 더 팔린다. 소비는 빨라지고, 반응은 가벼워지고, 사람은 지치지만 플랫폼은 성장한다. 이 구조에서 우리가 배운 건 한 가지다. 불편은 실패다. 그런데 이건 거짓말이다. 불편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다. 과정이 불편한 건 당연하다. 불편이 사라지는 순간, 사실상 배우는 일이 멈춘다.
광고가 자극하는 욕망도 똑같다. 갖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 그 욕망은 대개 물건이 아니라 완화다. 지금 내 불안을 잠깐 덮어줄 뭔가. 그래서 사고, 사진 찍고, 칭찬 받고, 다시 허전해진다. 그 반복이 습관이 되면 취향은 흐려지고 줏대는 무너진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인지 묻기보다, 지금 나를 달래줄 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해진다. 마찰을 피해 얻은 쾌락은 대개 유통기한이 짧다. 그 짧은 쾌락을 자주 먹으면, 긴 호흡이 필요한 기쁨은 버티지 못한다. 독서가 지루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깊은 대화가 피곤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긴 문장을 읽는 힘, 긴 생각을 견디는 힘, 그게 약해진다.
그래서 나는 마찰을 어느정도 일부러 남겨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읽기 싫어도 몇 장 더 넘기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한 번 더 듣고, 실패할까 봐 겁나도 일단 해보고, 길을 잃어도 돌아가보고, 말이 안 통해도 손짓발짓으로 해보고. 이런 것들은 낭만이 아니라 훈련이다. 인간의 기초체력은 안정감이 아니라 복원력이다. 복원력은 마찰에서 나온다. 마찰 없이 살면, 무너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수에 관대한 사회가 강한 사회다. 실수는 인간의 기능이다. 실수를 금기시하면 사람들은 안전한 선택만 한다. 안전한 선택만 반복하면 경험은 얕아지고 태도는 더 비겁해진다. 조금 불편하면 남 탓을 하고, 조금 막히면 세상 탓을 하고, 조금 느리면 시스템 탓을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사실은 마찰을 감당할 능력이 줄어든 것뿐인데도.
고생을 숭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불편을 견디는 내성을 되찾자는 뜻이다. 그리고 불편이 사실은 불편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섞여 사는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삐걱거림이라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익숙해지라는 말이다. 어색함에서 도망치지 않고, 지루함을 견디고, 실패를 한 번 더 버티는 습관을 만들라는 말이다.
기술이 대체할 수 있는 지적 기능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가치는 더 인간적인 영역에서 갈린다. 태도, 복원력, 유머, 관계를 맺는 능력, 불확실성을 버티는 능력. 이건 알고리즘이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그 영역을 계속 외주 주면, 결국 남는 건 디자인뿐이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몸은 빈약한 사람. 이해는 빠르지만 실천은 없는 사람.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아무것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마찰을 없애며 만든 인간형이다.
그러니 불편을 무조건 제거하지 말자. 불편을 통과하는 일을 다시 배워야 한다. 느리게 읽고, 어색하게 말하고, 땀나게 움직이고, 틀려도 해보고, 실패해도 고치고, 다시 해보는 사람. 그 사람은 요즘 시대에 흔치 않다. 그리고 흔치 않기 때문에 더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