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지 않는 사람은 보호받은 사람이 아니라 버텨본 사람이다
온실의 화초를 부러워하면 안 된다는 말은, 알고 보면 꽤 잔인한 위로다. 겉으로 보기엔 늘 반들반들하고, 상처 하나 없이 곧게 자란 것 같지만, 사실 그 힘은 온실이라는 조건 위에 세워져 있다. 일정한 온도, 적당한 습도, 예측 가능한 햇빛. 바람은 차단되고 비는 조절된다. 그 안에서 자라는 존재는 빠르고 곧게 자란다. 문제는 그 환경이 영원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 전제가 무너지는 순간, 화초는 금방 상처 나고 부서진다. 온실은 언젠가 열리고, 균열이 생기고, 관리자가 떠난다. 그 순간 화초는 스스로의 뿌리로 세상을 견뎌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마주한다. 온실 밖은 냉정하다. 온실에서 잘 자랐다는 사실은, 밖에서 살아남는 능력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세상은 그런 온실을 오래 허락해 주지 않는다. 가족이든, 직장이든, 국가든, 어느 순간에는 균열이 간다. 누군가가 지켜주던 울타리가 느닷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평생 유지될 줄 알았던 시스템이 순식간에 뒤집히기도 한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가진 강함이 내 것인지, 아니면 온실의 조건이 만들어 준 착각이었는지를.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곳이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 통제할 수 없는 변수, 준비되지 않은 선택들이 겹친다.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단정함보다 탄성이 필요하다. 보호보다 복원력이 필요하다. 온실은 안전하지만, 그 안전은 조건부다. 누군가 계속 유지해줄 때만 작동한다. 그래서 온실에 안주하는 삶은 편해 보이지만,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스스로 온도를 조절해본 적이 없고, 바람을 맞아본 적이 없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스스로를 잡초처럼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잡초라는 말에는 대개 부정적인 뉘앙스가 따라붙는다. 쓸모없고, 보기 싫고, 존재를 지워야 할 것 같은 대상. 정제되지 않았고, 보기 좋지 않고, 방향도 일정하지 않은 것 같은 삶. 그런데 자세히 보면, 잡초는 어디서든 산다. 돌 틈에서도, 아스팔트 사이에서도, 물이 적어도, 흙이 거칠어도 살아남는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모양과 색을 조금씩 바꾸면서도, 어떻게든 뿌리를 내린다. 그 생존력은 화려하지 않지만, 대신 아주 끈질기다. 그리고 그 적응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없이 꺾이고, 다시 자라고, 방향을 틀며 축적된다. 겉으로 보기엔 난잡해 보여도, 그 안에는 수많은 실패와 조정의 기록이 있다.
어디에서도 산다는 말은 단지 이민을 가고, 도시를 옮기고, 직장을 바꾸는 차원을 넘어서 있다. 익숙한 환경이 한 번에 사라졌을 때, 그 안에서도 내 삶의 리듬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힘. 누군가 옆에서 대신 전화해 주고, 대신 서류 써주고, 대신 해결해 주지 않아도, 시간을 들여 방법을 찾아가는 힘. 한 번도 안 해본 일을 앞에 두고, 무서워하면서도 조금씩 손대보는 힘. 그런 작은 선택들이 쌓이는 과정은 대개 괴롭다. 처음으로 공공기관에 혼자 전화해 보던 날, 병원 접수를 혼자 해보던 날, 이사 온 도시에서 은행 계좌 하나 여는 데 하루를 다 쓴 날. 그때의 피로와 허무함을 떠올리면, 솔직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분명 있다.
그래서 삶의 모든 순간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말은 낭만이 아니다. 결정은 늘 불편하고, 선택은 늘 불안을 동반한다. 누가 대신 정해주지 않는 삶은 고단하다. 잘못된 선택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고, 결과를 변명할 대상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 과정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무엇이 나를 무너뜨리는지, 무엇이 나를 다시 세우는지 몸으로 알게 된다. 그 경험들이 쌓이면, 그건 더 이상 온실이 아니라 성채가 된다. 외부의 충격을 완전히 막아주는 공간은 아니지만, 공격을 받아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구조.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문제 앞에서, 내가 직접 부딪쳐 해결해 본 경험들이 층층이 벽을 세운다. 타인의 인맥이나 재정, 권위에 기대지 않고도 버티는 연습을 한 만큼, 내 삶의 기초 체력이 늘어난다. 안정적인 조건이 있을 때도 좋지만, 없어졌을 때 더 빛나는 힘이 있다면, 그건 결국 내가 직접 길어 올린 역량에서 나온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모가 해줄 수 없는 선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학비를 대신 내주거나, 집을 마련해 주거나, 취업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구간이 있다. 내 마음을 대신 견뎌줄 수 없는 부분, 누군가의 보호로는 넘어갈 수 없는 단계,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대신 지지 못하는 부분. 그 지점부터는 결국 스스로의 역량 싸움이 된다. 감정 조절, 판단의 책임, 실패를 수습하는 능력, 외로움을 견디는 힘. 이건 물려받을 수 없고,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결국 스스로 겪어야 생긴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그동안의 고생이 방치가 아니라 훈련이었음을. 보호받지 못한 시간이 공백이 아니라 축적이었음을.
누군가는 온실에서 평생 살아도 무너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행운을 부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러움은 멀리서 볼 때만 유효하다. 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언제 어떤 바람이 불어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때 나를 지켜주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온실의 안정감이 아니라 내가 잡초처럼 버티며 쌓아 온 내성일 것이다. 그러니 내 삶이 때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 남들처럼 예쁘고 안전한 온실에 있지 못한 것 같아 서글플 때, 한 번쯤은 이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이 거친 자리들이, 언젠가 내 성채의 일부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오늘 하루의 버팀은, 생각만큼 쓸모없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지어온 것이 온실이 아니라 성채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 성채는 완벽하지 않다. 허술한 부분도 있고, 여전히 보강 중인 벽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하나다. 그 안에서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누군가 떠나도, 환경이 바뀌어도, 조건이 달라져도 무너지지 않는다. 잡초라는 말이 더 이상 욕처럼 들리지 않는 날이 온다면, 아마 그때 우리는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을 조금은 믿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