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폭풍과 자유

이방인의 자리에서, 자유를 다시 본다

by 샤누자오사무

미국 대다수 지역이 눈폭풍을 맞고 있다는 소식을 본다. 마트 진열대가 비고, 하얗게 얼어붙은 동네 사진이 타임라인을 채운다. 눈 때문에 벌어진 에피소드들이 농담처럼 돌지만, 나는 그 안에서 오래된 감각 하나를 다시 꺼낸다. 예전에 미드웨스트에서 공부할 때, -40°C와 -40°F가 같다는 사실을 배웠다. 창틀에 콜라를 두면 과냉각된 액체가 병뚜껑이 열리는 순간 슬러시로 변하는 장면을 실제로 봤다. 학교에서 밖에 5분 이상 나가지 말라는 경고문을 받아든 날도 있었다. 그 폭풍과 추위가 나는 좋았다. 극단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그 나라의 어떤 약속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역마다 다른 문화가 있고,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공존하며, 어떤 사람은 끝까지 자기 방식대로 살아도 된다는 느낌. 내가 열망했던 미국은 그런 나라였다.


내가 처음 꿈꾸던 미국은 자유의 나라였다. 태어난 곳이 아니라 선택으로 시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열어둔 나라, 어떤 배경이든 원하면 합법이라는 절차를 통해 새 이름을 얻을 수 있는 나라. 한국에서 느꼈던 집단주의와 획일화, 그 안에서의 숨 막힘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는 곳. 특히 뉴욕은 나 같은 사람에게 더 결정적이었다. 이방인이 너무 많아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덜 특별해지는 도시. 거기서는 어디서 왔는지보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해 보였다. 빠르게 걷고 빨리 판단하지만, 서로의 사정을 오래 묻지 않는 대신 이상하게도 서로의 존재를 건드리지 않는 방식. 무관심처럼 보이는데 무례는 아닌, 그 태도가 내게는 안도감이었다. 뉴요커라는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뉴욕 밖의 미국인들도 뉴욕을 특수하다고 했다. 나는 그 특수함 안에서 잠시 덜 경계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미국을 바라보면, 내가 그동안 보아온 미국 중 가장 충격적인 상태에 가깝다. 선동이 거짓을 진실처럼 유통하고, 공권력이 시민의 일상에 난폭하게 개입하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무엇보다 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사건 이후의 말들이다.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사회. 정당방위, 선동, 협조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 그 문장들이 너무 빨리 등장하고 너무 쉽게 공유되는 순간, 상식이 무너지는 느낌이 온다. 누가 공권력에게 그 결론까지 허락했나. 무엇이든 단어 하나로 덮을 수 있다는 확신이 너무 가볍다. 영상이 존재해도 사람들은 같은 장면을 보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낸다. 누군가는 법 집행을 말하고, 누군가는 처형을 떠올린다. 이 간극이 지금의 어지러움이다. 그리고 그 어지러움은 결국 시민에게 한 가지 습관을 학습시킨다. 말하기 전에 계산하라. 질문하기 전에 안전을 먼저 생각하라. 그러다 보면 결국 말이 줄어든다. 말이 줄어드는 사회에서 가장 편해지는 쪽은 언제나 이미 힘을 가진 쪽이다.


영국에 와서 더 이상해진 것은, 미국의 불안을 떠나왔는데 불안의 구조 자체는 다른 얼굴로 계속 보인다는 점이다. 영국은 아직 명목상 왕과 왕가가 남아 있는 나라이고, 계급의 흔적이 삶의 곳곳에 남아 있다. 여기에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말이 있고, 여기에도 언제든 더 거친 방향으로 쏠릴 가능성이 있다. 다만 체감하는 공포의 방식은 다르다. 미국의 공포가 속도와 확산의 문제라면, 영국의 공포는 침전과 관성의 문제에 가깝다. 미국에서는 분노가 빠르게 조직되고 단어가 즉시 무기가 된다. 진영이 실시간으로 갈리고, 언어가 전투태세로 전환된다. 그래서 폭력 이후의 서사는 전쟁처럼 전개된다. 누가 먼저 위협이었는지, 누가 규칙을 어겼는지, 누가 살아남을 자격이 있었는지. 반면 영국에서는 불만이 축적되지만 폭발하지 않고, 불의가 항의되기보다 관리되는 장면이 더 자주 보인다. 이곳에서는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 분류되기 쉽다. 공권력은 덜 난폭해 보일 수 있지만, 대신 책임이 절차 속으로 천천히 빠져나간다. 미국이 소리로 사람을 압도한다면, 영국은 절차로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시민은 결국 길들여진다. 미국에서는 공포가 과잉 생산되어 순응을 유도하고, 영국에서는 피로가 축적되어 체념을 학습시킨다. 하나는 너무 크게 말하고, 다른 하나는 너무 오래 말하지 않는다. 결과는 닮아 있다. 시민은 말해야 할 때 말하는 대신, 말했을 때의 비용을 먼저 계산한다. 이 말이 나를 위험에 빠뜨리진 않을지, 이 질문이 나를 피곤한 사람으로 만들진 않을지. 그렇게 말은 더 적어지고, 침묵은 더 많아진다. 그리고 침묵이 늘어난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언어는 결국 국가의 언어, 권력의 언어가 된다. 나는 이 두 나라를 바라보며 자유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자유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는 상태가 아니라, 말해야 할 때 말해도 삶이 부서지지 않는 상태다. 안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일이 일어났을 때 책임이 분명히 작동하는 구조다. 그 구조가 흔들릴 때 삶은 급격히 취약해지고, 그 취약함은 가장 먼저 이방인에게, 가장 약한 위치에 선 사람들에게 전가된다.


나는 이방인의 자리에서 그걸 더 분명히 느낀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미국 중서부에서 공부했고, 뉴욕에서 10년 넘게 일했고, 지금은 영국에 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기 때문에, 두 시스템의 균열이 더 또렷이 보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 사회의 균열이 뉴스로 끝나지만, 이방인에게 균열은 신분과 생계와 발화의 가능성에 닿는다. 그래서 나는 정치적 진영보다 국가가 가진 가장 큰 힘을 붙잡고 보게 된다. 사람을 제압할 권한. 그 권한이 치명적 결과를 만들었을 때, 사회가 어떤 언어로 그것을 처리하는지. 이방인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이겼는지가 아니라, 그 처리 방식이 내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다. 내가 더 두려운 건 총성이 아니라 총성 이후의 말들이다. 협조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는 말, 안전이 최우선이니 현장에서 따지지 말라는 조언. 그 말들은 현실적 조언처럼 보이지만, 다른 메시지를 함께 실어 나른다. 권력 앞에서 항변하지 말라. 권력의 판단이 곧 현실이다. 살아남는 것이 먼저다. 이때 사람들은 흔히 피해자 탓으로 안정을 얻는다. 나는 저 사람처럼 하지 않을 거니까 괜찮을 거라는 믿음. 내가 조심하면, 내가 예의 바르면, 나는 살아남을 거라는 믿음. 하지만 그 믿음은 불편한 진실을 가린다. 권력이 마음먹으면 통제는 개인의 손을 벗어난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사회를 더 잔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중립이라는 말 뒤에 숨고 싶지 않다. 구조가 명백히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의 중립은, 결국 방조로 작동한다. 나는 법과 질서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법과 질서가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지, 누구를 희생 비용으로 삼는지 묻지 않는 태도는 거부하고 싶다. 치명적 무력 사용은 가장 마지막 수단이어야 하고, 사후에는 투명한 증거 공개와 독립적 검증이 따라야 한다. 그게 무너지면 법 집행과 폭력의 경계가 흐려진다.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누구든 다음 이름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사회 전체로 번진다. 그리고 그 공포는 다시 침묵을 낳는다. 침묵은 다시 권력의 편의를 낳는다. 이 순환을 끊으려면 적어도 한 가지는 해야 한다. 정상이라고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상식이 무너졌다고 말하는 것. 책임 있는 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선량하고 뜻 있는 시민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신념이라기보다, 마지막 기술로 붙잡고 싶다. 냉소는 가장 쉬운 결론이고, 이방인은 특히 냉소에 가까운 자리에 오래 서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공동체에도 완전히 기대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을 믿는 방식이 더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조롱보다 애도를, 정당화보다 검증을, 단정보다 확인을.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한다. 조용히 있는 것도 죄가 되는 순간이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침묵은 결국 가장 강한 쪽의 언어가 된다. 안전한 방에서 분노를 소비하는 나 자신이 역겹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역겨움으로 끝내면 더 비겁해진다. 최소한 말해야 한다.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말의 온도를 자동으로 낮춰주지 않도록. 이방인의 말이 언제나 조심스럽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규칙에 굴복하지 않도록. 나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보고, 더 단단하게 말할 의무가 있다.


결론은 단순하다. 자유는 구호가 아니라 구조이고, 안전은 조언이 아니라 책임이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그 구조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이방인의 삶이다. 그래서 나는 국가를 사랑하겠다는 말 대신, 기준을 사랑하겠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을 제압할 권한은 엄격히 제한되어야 하고, 그 권한이 치명적 결과를 낳았다면 사회는 먼저 애도하고 다음에 검증해야 한다. 어떤 단어도 죽음을 덮는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 기준이 지켜지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 그 세계가 오지 않는다면, 그 세계를 요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방인의 자리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건 불행이 아니라 감각이다. 나는 그 감각을 버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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