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수레의 소리, 남는 것의 무게

조직에서 숨이 가빠지는 감각, 악의가 아닌 무지의 집합이 더 잔인하다.

by 샤누자오사무

빈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누군가 일부러 조여오는 건 아닌데도 숨이 막힌다. 명확한 원인이 보이지 않으니 더 답답하다. 오히려 차라리 목을 죄는 손이 있다면 낫겠다 싶다. 최소한 그럴 땐 이유가 있지 않나. 지금은 설명할 수 없는 불투명함이 목줄처럼 매달려 있을 뿐이다.


이메일을 읽지 않는다고 당당히 말하는 상사를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아, 여기는 진짜다.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아는 척만 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자리. 모르는 게 부끄럽지 않고, 모르는 채로 결정을 내려도 아무 문제 없는 구조. 신기할 만큼 조직은 굴러간다. 그 비밀은 침묵과 체념이다. 누군가는 모른 척했고, 누군가는 포기했고, 결국 모두가 그 무심함에 기대어 하루를 넘긴다.


출근이라는 건 물리적 이동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동안 조금씩 빠져나간다. 의욕도, 책임감도, 자존감도. 심지어 나 자신마저도. 그리고 나는 매번 속으로 농담을 던진다. 언젠가 그냥 로그아웃하듯,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그런데 그런 용기조차 없다. 소리치고 욕설을 퍼붓고 싶지만, 이미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결국 내 입에서 나오는 건 한마디뿐이다. “그냥 좀 힘들어요.” 그냥이 아니다. 아주 오래, 아주 깊게 힘들다. 하지만 그것을 다 말로 꺼낼 수 없으니, 결국 ‘그냥’이라는 말에 묻어버린다. 그 두 글자 속에 수많은 구체가 눌려 들어가 있다.


미래도 잘 모르겠다. 나아질 거라 믿지도 않고, 안 나아질 거라 단언하지도 않는다. 모르겠다. 그저 숨만 쉬고 싶다. 그게 요즘의 유일한 소망이다.


이 구조가 더 잔인한 이유는 악의가 없어서다. 무지와 무능, 무심이 쌓여 만든 시스템. 누구도 상처를 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구조. 그러나 나는 상처를 입는다. 그 무게는 더욱 무겁다. 일이 힘든 게 아니다. 일의 형상으로 다가오는 비합리, 그것을 매일 삼켜야 하는 게 고통이다.


돈은 여전히 삶을 지탱한다. 먹고 싶은 것을 고민 없이 고르는 안락함, 필요한 것을 주저 없이 사는 편리함. 그것이 내 삶을 굴러가게 했다. 그러나 문득, 그 익숙함이 피로를 만든다는 걸 알았다. 뉴욕과 서울은 자본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직장, 연봉, 겉모습이 곧 서사가 된다. 소비를 통해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사회. 그 감각조차 점점 무뎌지고 있다.


덜 쓰고 덜 가지는 삶을 상상하면 묘한 위안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곧바로 의심을 불러온다. 못 벌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는 말. 핑계 아니냐는 질문. 다 아니라고는 못 한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리다. 중요한 건, 그 시선에 맞추기 위해 무리하는 게 진짜 내 삶인지 되묻는 것이다.


현실은 냉정하다. 나 하나 단순하게 살고 싶어도 가족을 지탱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결국 그 책임은 돈으로 측정된다. 검소한 삶을 꿈꾸다가도 잔고를 확인하며 다음 월급일을 계산한다. 그 순간의 감정은 평온하지 않다. 오히려 참담하다.


줄다리기는 매일 계속된다.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과 내려놓을 수 없는 현실. 그 사이에서 조금씩 무뎌지고, 조금씩 체념한다. 체념마저 스스로 위로해야 한다. 다들 이렇게 산다고, 괜찮다고. 그러나 그 말조차 공허하다.


어쩌면 손해가 아니라 균형일지도 모른다. 소비로 눌러왔던 허세가 빠져나가면, 남는 건 단순한 시간과 평범한 호흡이다. 돈이 줄어도 삶은 가벼워질 수 있다. 숨이 쉬어지는 속도에 따라 일상의 무게가 바뀐다는 걸 알게 된다.


끝내 남는 건 씁쓸한 체념이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꼭 그 끝에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돈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바람조차 쉽게 꺼내지 못하는 시대다. 그래서 더 쓸쓸하다. 이제는 숫자가 아니라 감각으로 삶을 재고 싶다. 통장이 아니라 호흡으로, 하루의 길이로. 남는 것의 무게는 결국, 내가 어떻게 숨 쉬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