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도
이처럼 안전하고 선택 가능한 충돌은
가능할까.
나는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 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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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는 충돌이 피로하게 느껴지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다.
충돌이 피로한 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회사에서는 협업과 위계 관계가 얽혀 있고,
충돌이 아니라 연합이었으면 하는 관계도 있다.
어떤 의견 충돌은 누군가에게는
평가로 작용되기도 하고,
어떤 분위기에서는
충돌 자체가 허용되지 않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부딪히는 타격감보다
그저 수용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흘려보내는
그런 유연함을 선택하곤 한다.
나 또한 그런 유연함을
관계의 미덕으로 삼고 살아온 시간이 길다.
나는 원래 충돌을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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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안전한 충돌을 경험했다.
놀랍게도 회사라는 공간이었다.
위계 관계가 분명하고,
의지가 아니라 의무로 묶여
시간을 함께 보내는 그곳에서
나는 안전한 충돌을 경험하게 되었다.
관계가 조금씩 쌓이고,
그분에 대한 존중이 생기면서
처음 느낀 이상함을 감지했다.
‘굉장히 날카로운데, 위축되지는 않네?’
‘그래도 설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네?’
그저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느낌보다는
내가 내 생각을 펼칠 수 있도록
잽을 날리며 나를 도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 이건 뭔가 다른데?
나도 한 번 받아쳐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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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날린 잽을 맞으면
타격감이나 통증이 느껴질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통증보다는
내 자세를 점검하게 되었다.
그분이 짚어내는 것은
나를 향한 말이 아니라,
내가 사용한 단어, 표현, 정의 같은 것들을 향한
질문처럼 느껴졌다.
나를 부정하기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정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틀렸다는 느낌보다
다듬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방어하기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권투 코치가
“너 연습 안 했어?”라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러브를 어떻게 착용해야 하는지,
스텝을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지금 이 주먹을 어떤 의도로 날린 것인지
다시 묻게 하는 느낌이었다.
또 하나는
설명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내가 얼버무리려 하면
그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되묻는다.
그래서 나도
그저 지나치지 않고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말을 꺼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상했던 건,
그렇게 크고 작은 충돌을 주고받고 나서도
관계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회사 복도에서 마주치면
아무 일 없었던 듯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업무 이야기를 하거나,
그저 묵례를 하며 지나간다.
이런 일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점점 나는
구태여 설명을 피하는 일이 줄어들게 되었고,
충돌이 늘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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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안전한 관계’라고 하면
이런 모습들이 떠오른다.
말이 부드럽고,
서로 맞춰주고,
충돌이 없는 상태.
하지만 이런 관계 속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을 숨긴 채
조용히 맞춰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충돌이 위험하다고 느꼈던 내가
상대를 맞추기 위해 애써왔던 것처럼.
배려와 존중이
나를 배제한 채
상대에게만 향하고 있었던 순간들.
물론 이런 유형의 모든 관계가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내 생각 속에는
지난날의 내 모습이 짙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충돌은 달랐다.
말은 날카로웠고,
의견은 나와 정반대였으며,
충돌도 꽤나 빈번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관계의 형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던 충돌은
이런 흐름이었다.
충돌 > 감정 상함 > 거리감 생김 > 관계 악화
하지만 내가 경험한 충돌은
이렇게 이어졌다.
충돌 > 생각 확장 > 대화 지속 > 관계 유지
안전한 충돌은
아프지 않은 대화가 아니었다.
친절하거나 따뜻하지 않을 수도 있고,
무뚝뚝할 수도 있고,
때로는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 상태.
안전한 충돌은
상처가 없는 대화가 아니라,
충돌 이후에도 관계가 남아 있는 대화였다.
마치 규율이 있는 링 안에서의 대화처럼.
관객이 가득한 긴장된 경기장이 아니라,
사고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장에서의 스파링.
물론 아무리 훌륭한 코치라도
모든 선수에게 맞지 않듯,
이 방식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순간을 지나는 나에게는
그 관계가 잘 맞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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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로는
늘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그저 유머로 넘기려던 내 말에
질문이 예상보다 깊게 들어오고,
단어 하나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 순간들.
그럴 때면 잠시 당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하고 싶지는 않았고,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고,
다음 대화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대화를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충돌을 조금 더 끝까지
따라가 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같은 말을 하고도 어긋나는 순간들을,
그냥 넘기지 않고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었다.
다음 화에서는
그렇게 스쳐 지나갔던 몇 가지 장면들과,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르게 이해하며
엇갈렸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