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을 다르게 이해하는 순간
어느 순간부터 나는
방향이 다른 대화를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충돌을 조금 더 끝까지
따라가 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같은 말을 하고도 어긋나는 순간들을,
그냥 넘기지 않고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렇게 스쳐 지나갔던 몇 가지 장면들과,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르게 이해하며
엇갈렸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
힐링과 게으름,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분이 한 영화를 추천하셨다.
체인소맨.
애니메이션이고,
시골쥐 도시쥐 이야기라고
덧붙이셨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쥐가 주인공이었던 애니메이션,
라따뚜이를 떠올렸다.
———
주말 저녁,
신랑과 나란히 앉아 편안하게 볼 영화를 고르다가
문득 그 영화가 생각나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썸네일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었다.
피 묻은 전기톱을 들고 있는
인간 병기의 모습.
나는
황급히 채널을 돌렸다.
———
다시 그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되었을 때,
나는 그때의 괴리감부터 꺼냈다.
아니, 어떻게 이게 시골쥐 도시쥐 감성이냐고.
라따뚜이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고.
그런데 그분은
주요 흐름은 시골쥐 도시쥐가 맞다고 하셨다.
나는 내가 떠올렸던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분은 그 안의 구조와 삶,
그리고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
나는 장면을 떠올렸고,
그분은 구조를 보고 있었다.
사실 그때 나는
그 이야기를 꽤 작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라따뚜이를 기대했다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전기톱을 보고
당황했던 그 장면에 머물러 있었고,
그분은
그 너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의 결이
아주 미묘하게 어긋났다.
그분도 그걸 느끼셨는지,
“정 보기 어렵다면,
이해를 위해 그 작품에 대한 리뷰를 먼저 보라”고
안내해 주셨다.
———
그래서 나는
그 리뷰를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분이 말하고자 했던
‘시골쥐와 도시쥐’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떠올렸던
아기자기한 동화의 장면이 아니라,
원치 않게 전쟁터에서 길러지고
도구로 사용되다가,
평범한 삶을 꿈꾸는 순간마저
짓밟혀버리는 이야기였다.
———
나는 장면에 머물러 있었고,
그분은 그 안의 구조를 보고 있었다.
리뷰를 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장면에만 머물러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덮어두고,
간과한 채 지나가고 있었는지도
함께 떠올랐다.
나는 확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그때는 그저
생각이 다르다고만 느꼈다.
그런데 비슷한 장면들이
계속 이어졌다.
다음은
단어 하나에 걸렸던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감사한 일이 생겨
식사 자리를 한 번 만들려고
일정을 조율하던 중이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평소 신랑이나 친구들과도
편하게 쓰던 말이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보냈다.
그런데 돌아온 답장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런 거 일처럼 말하지 마세요.
저도 일개 직원입니다. 검토 안 해요.”
순간,
내가 뭔가를 잘못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엥?
나에게는 가볍게 건넨 말이었는데,
그분에게는 전혀 다른 결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때 알게 되었다.
같은 단어도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검토’는
가볍게 의견을 묻는 표현이었지만,
그분에게는
분명한 역할과 책임이 담긴
직무의 언어였다.
———
그때부터였다.
같은 말을 쓰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체감하기 시작했다.
나는 후숙형이었고,
그분은 즉각형에 가까웠다.
나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고,
그분은 그 안에서 핵심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의미를 따라가고 있었고,
그분은 정의를 세우고 있었다.
———
그래서 같은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대화의 도착지는
늘 조금씩 달랐다.
대화를 할 때,
오히려 자주 부딪혔다.
그런데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드러났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잘 받아주시니 다행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이젠 저에겐 그 벽을 부술 망치는 없습니다.
제 머리만 깨질 뿐입니다.”
———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아마도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설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 부딪쳐온 사람의
피로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야
그 충돌을
조금씩 시도해 보는 단계인데,
그분은 이미
그 시간을 충분히 지나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충돌을 피하기보다
조금 더 끝까지 들어보는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신랑과의 충돌에서는
이런 시도가 늘 한 박자 늦게 따라오는 걸까.
아마도 나는
충돌에도
서로 다른 장르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