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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forter May 19. 2020

감정을 돌본다는 것 (1)
텅 빈 느낌, 공허감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실재하는 곳은 뇌입니다. 뇌는 이성적 사고를 관장하는 기관일 뿐 아니라 감정의 중추이기도 하죠.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성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감정은 미성숙하고 거추장스러운 어떤 것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이미 태어나기 이전부터 진화적으로 깊게 각인된 감정의 흔적이,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끊임없이 부정당하는 경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감정적으로 굴지 말라고,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긍정적인 감정으로 위장하라는 메시지들이 외부 세계로부터 쏟아집니다. 나의 내면 세계의 풍경과 맞지 않는 목소리들로 인해, 내 마음이 들어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갑니다. 그렇게 억눌러진 마음은 어디를 향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누군가와 나누는 것을 어색해합니다. 심지어 심리상담을 받기 위해 상담자를 찾아온 사람들조차도 감정을 다루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문제는 그대로 있을 뿐이잖아요!” 그들은 분노에 차서 변하지 않는 바깥 세상에 초점을 두느라,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놓칩니다. 혹은 감정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감정을 잘 숨기고 억누르는 자신을 이성적인 사람이라 믿으며, 감정적인 사람들을 혐오하기도 합니다.     

 

 물론 감정을 말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그 자체로 처리를 요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영역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느껴지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이름을 붙이고, 표현하고,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와 나누는 일련의 과정들을 충실히 이행해야 합니다. 이러한 처리 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을 때, 곪아 터진 감정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공격합니다. 감정을 말하는 것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할지언정,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느껴지는 위험 신호를 감지하여 우리를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심리적 압력이 낮아지면, 바깥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여유와 에너지가 생겨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한 나의 감정을 표현할 만큼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줍니다. 나는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누군가와 함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것은 인간다운 삶의 가장 본질적인 요건이 됩니다. 이러한 연결감을 느낄 수 없을 때, 우리의 마음에선 이런 질문이 떠오르죠. ‘왜 사는 걸까?’     


 감정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 경험에 꼭 맞는 언어를 부여하지 못하는 상태를 일컬어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이라고 합니다.  감정표현불능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사람들의 내면에는 알게 모르게 자신에 대한 부적절감이 숨어있습니다. 무언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너무 냉정하다거나, 너무 이성적이라는 질타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감도 잡기 어렵습니다. 표면적으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사람일지라도,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깊게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내면 세계에서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가식적으로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진정으로 타인을 신뢰하고 좋아한다기보다는, 사회생활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좋아할 만한 행동 양식을 충실히 이행하는 일종의 역할 놀이를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그들은 친절한 행동을 하고도 자기 안의 선의를 의심합니다. ‘나는 생존을 위해서 그들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필요에 따라 도구적으로 사람을 사귀고 있을 뿐이다’ 같은 차갑고 냉정한 자신의 일면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더 친절함을 가장할 수 있습니다. 혹은 타인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관계 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그 상황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됩니다.     


 감정을 돌보지 않는 자들이 느끼게 되는 주된 감정은 공허감입니다. 공허는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지만, 그 무엇보다 실존을 위협할 수 있는 강렬한 감정입니다. 안이 텅 빈,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바로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환상을 가지게 됩니다. 공허한 자신을 잊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이 동원될 수 있습니다. 요즘 시대는 사람들과의 감정적 연결을 차단하는 대신, 공허를 잊게 해주는 많은 수단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적 없는 인터넷 서핑을 몇 시간이고 지속하고, 유튜브 알고리듬이 추천해주는 영상에 탐닉합니다. 게임 레벨을 높이는 데 열중할 수도 있고, 열심히 돈을 소비하거나, 감정적 허기를 음식물로 채워 넣기도 합니다. 때로는 술과 약으로 자신을 잊고, 공허를 일순간에 날려줄 짜릿하고 강렬한 스릴을 위해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탈을 강행합니다.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자해를 하거나 자신을 죽입니다.     


 이 모든 방법들이 그다지 건강하지 않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매우 생산적이고 자기 절제가 잘 되는 일부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합니다. 그들에게는 성취와 성공이 마음의 구멍을 메우는 최고의 수단이 되는데, 대체로 그들은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도전적이며 야망 있는 사람들로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일을 잠시 중단했을 때, 그 잠깐의 틈으로 밀려오는 거대한 공허감이 순식간에 자기 자신을 잠식해버립니다. 그럴 때면 자신이 그렇게도 매달렸던 일에서도 슬럼프가 찾아옵니다. 도무지 뭔가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나 갈망하고 추구했던 목표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이 성공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많은 경우 우리는 감정을 다루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또한 감정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의 물리적인, 정신적인 여유가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처리 방법을 모른다고 해서, 시간이 없다고 해서 내버려 둘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안이 아닙니다. 인간이 감정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는 이상, 감정을 배척한 삶은 지속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나에게 찾아온 감정이라는 까다로운 손님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은 언젠가 큰 대가를 치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는 걸까?’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감정에 자리를 내어주고, 감정을 돌보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감정을 돌본다는 것은 털 카펫을 빗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 발길질에 짓밟혀 윤기를 잃고 말라붙은 털카펫을 손질하면 부드럽고 풍성한 털의 감촉이 살아납니다. 정성스런 돌봄으로 감정의 결이 살아나면, 감정은 곧 우리를 감싸고 지탱하는 온기가 되어줍니다. 살아있음의 증거가 되고, 삶의 의미가 되어줍니다.


*참고하세요.

Jonice Webb. 정서적 방치와 공허감의 치유.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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