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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forter May 25. 2020

나 자신이 된다는 것

 심리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 심리치료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인간이 변하나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물려받은 유전자, 타고난 본성, 정해진 운명, 주어진 환경,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대한 좌절의 표현이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픈 욕망, 혹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고 싶은 통제 욕구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고대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가 정신분석의 명제가 된 것은, 그만큼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도록, 내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 왜 그렇게나 무서운 일일까요? 내가 누구인지 똑바로 마주 볼 수 있는 거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걸까요?    

 

 인생 최초로 나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은 바로 부모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오로지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유아에게 부모는 세상 전부이고, 자기를 둘러싼 우주 그 자체입니다. 대다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것이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픈 선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기저에는 ‘내 자식이지만 나와 다를 수 있고, 내 자식이지만 잘 모를 수 있다’는 무지에 대한 인정과 나와 자녀를 별개의 존재로 떼놓고 볼 수 있는 독립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나는 너에 대해 아직 잘 모른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러한 무지에 대한 허용이 자녀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부모도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부모 역시 자신이 물려받은 불가항력적인 굴레를 답습하기 마련이고,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래서 선의와는 다르게, 자신의 결핍과 열등감, 자신이 삶에서 이루지 못한 과업들을 알게 모르게 자녀에게 전가합니다. 그리고 ‘너는 이런 사람이지’,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지?’,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희생하고 있다!’와 같은 말들로, 자녀의 마음 속에 부모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속박하는 창살을 구축해 놓습니다.    

 

 많은 경우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이름 붙여지고 규정된 가짜 정체감이 자기의 진짜 모습과 불일치하는 데서 오는 균열이 신경증의 원인이 됩니다. 부모의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자녀를 비하하고 깎아내리는 것이 자녀의 자존감에 상처를 남길 것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자녀의 실제 모습보다 좋게, 멋있게 보이도록 부풀리고, 그것을 참으로 믿으며 치켜세우는 것도 자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늘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리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체중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신경과, 내과를 전전하고도 의학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자, 마침내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딸이 항상 1등만 하거든요. 저희는 항상 공부하지 말고 일찍 자라고 해요!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어요.”

엄마의 걱정 속에는 자부심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엄마가 자리를 비우자, 긴장한 기색이 가득한 소녀는 마치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듯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저는 사실 밤새워서 공부했거든요. 그리고 항상 1등만 하는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고, 혹은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고, 자녀의 성취와 외모를 과장하여 치켜세우고 우쭐해 하는 부모의 옆에서, 자녀는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무거운 왕관과 장신구를 몸에 짊어진 것 같은 중압감을 느낍니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부모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아이들은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는 빛나는 업적을 가져다주지 못하면, 언제든 내쳐질 수 있다는 불안을 품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쇳덩이는 대체로 평생 자신을 짓누르며,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하지 못할 이상적인 기준점으로 작용합니다.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자기 자신을 다그치며, 살아가면서 무엇을 이루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으로 만족하기가 어렵습니다.      


 사회적으로 봤을 때 부와 명예를 거머쥔 소위 성공한 자들의 내면 세계가 황폐한 것은, 대체로 자기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상이 어그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멋진 성취에 도취해 자만심에 가득 찬 모습을 보일지라도, 그 마음 속 거울은 끊임없이 티끌 하나 없는 어여쁜 외부 세계의 백설공주를 찾아내고, 자기의 모습을 실제보다 추하게 비춰줍니다. 하지만 그 거울은 너무나 절대적이라 감히 그 거울을 부정하거나, 깨끗한 손수건으로 굴절된 표면을 닦아낼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대신에 자기 몸에 묻은 티끌을 샅샅이 찾아내고, 더 멋지고 그럴듯한 포장지로 자신을 숨기기 위해 매진합니다.      

     

 물론 이 모든 비극이 오로지 부모의 책임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의 환상을 덧씌웠듯, 자녀도 부모에게 실제보다 무겁고 비장한 환상을 덧씌웁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준 왜곡된 거울은, 자녀의 마음에 도달할 즈음에는 더욱 극단적으로 왜곡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고, 부모는 더 이상 내 인생에 그렇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이 분명함에도, 그 거울은 좀처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원망과 분노에 차서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성토라도 할라치면, 아마 대다수의 부모들은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항변하는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부모가 그러했듯, 자녀 또한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른다.’ ‘내가 보는 부모의 모습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무지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녀의 마음 속 부모는 절대적이고 위협적이었던 환상 속 모습으로 박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며, 둘 간의 평행선이 좁혀질 가능성도 적습니다. 그토록 사랑한다면서, 그토록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토록 기구한 관계가 또 있을까요. 부모가 떠난 후 자녀에게 남겨지는 후회와 죄책감 또한 ‘진정으로 단 한순간도 부모를 한 인간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자는 심리치료가 부모의 과오를 탓하도록 만들고, 바뀔 수 없는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러한 심리학의 기조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심리치료 이론들의 근간에는 영혼의 치유를 향한 공통적인 뿌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를 탓하고 부모를 원망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닙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드는 정신분석의 목적이 정신분석을 통해 얻은 지식과 통찰력을 통해 ‘어린아이에 대한 양육 개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프 융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부모가 자기 몫의 삶을 다 살아냄으로써, 자녀가 그 자신이 되도록 허용해주는 것’이라고 했지요.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굴레로부터 스스로 걸어나와, 자신의 자녀에게 온전한 부모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온전한 존재가 되도록 양육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온전함은 완전함이 아닙니다.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고, 뒤틀리고 모자란 모습까지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을 온전히 비춰주는 거울을 스스로 마련해야만, 자신의 왜곡된 시선이 자녀의 마음 속에 거짓 자아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간이 변하나요?’에 대해 심리치료가 준비해 놓은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심리치료를 통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는 과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들이 인류를 만들었을 때, 신들은 인간이 찾아야 할 인생에 대한 해답을 어디에 놓을지 논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해답을 산 정상에, 지구 중심에, 바다 밑에 놓자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곧 '당장 찾아내고 말 것'이라는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마지막 신이 "인생에 대한 해답을 그들 안에 둡시다. 그들은 결코 해답을 찾지 못할 겁니다."라고 하였고, 신들은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자신에 대한 답은 자기 안에 있기 마련이고, 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솔직해짐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공포와 막막함이 밀려올 때면, 그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는 내 모습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살면서 알아가 보자’라는 무지의 자유를 자신에게 허용해주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참조

 James Hollis저,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The middle passage: From Misery to Meaning in Midlife), 더퀘스트

Fraser Boa 저, 융학파의 꿈해석: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와의 대담,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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