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Comforter
Jun 07. 2020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1)
사랑을 선택하는 책임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주제일 것입니다. 인간사에 사랑이 없었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망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생물학적인 재생산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강렬한 심리적 에너지를 품고 있는 대상을 향한 강력한 추동이며,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혹은 인생을 구원할 수도 있는 힘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기쁨과 슬픔은 인간이 향유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도 잔인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상에 대한 사랑을 제외하고 나면,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얼마 남지도 않을 것이며, 지구상에 의미 있는 일이라곤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환희와 달콤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라도 즐거운 일이지만, 사랑이 이토록 고귀하고 중요한 가치가 된 것은, 사랑의 무게를 실감케 하는 어렵고 복잡한 측면들의 존재 때문일 것입니다. 첫 번째 무게는 사랑을 선택하는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결혼과 출산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치러야 할 발달 과업으로 여겨지던 시대가 저물고 있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는 누군가를 꼭 만나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해야 한다는 동기 자체가 많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결말이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사랑을 주고, 또 받는 것에 대한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만남이 외부에 의해 강제된 결속이 아니므로,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것에 더욱 신중해야 하고, 자율적인 의지에 따르는 행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나요?”, “이 사람과 헤어져야 할까요?”
혼자 하는 일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도, 사랑의 영역으로 가면 자신의 선택을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관계의 절반은 상대의 몫이기 때문에, 아무리 나의 의지가 충만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관계에서 상처받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선뜻 누군가를 믿지도 못하고, 자신의 안목을 믿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이 명백하게 둘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실패한 관계에는 자신의 책임이 적어도 반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신의 답이지, 상대가 얼마만큼이나 쓰레기였는지를 입증하거나, ‘네 인생 꼭 망하길 바란다.’, ‘너 평생 후회하며 살기 바란다.’라며 저주하거나, ‘불쌍한 네 인생 내가 구원해주려고 했는데!’ 같이 환상에 빠지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 정도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거기에만 머물러있으면 같은 과거의 시나리오를 재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상대의 몫까지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계를 지속하는 와중에도, 관계가 끝난 후에도, 자기의 몫은 자기의 몫으로, 상대의 몫은 상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기본 원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야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줄 수도 있다는 말들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 진부하고 상투적인 말들, 부모로부터 양질의 돌봄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낙인이 되고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들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는, 이 말들이 사랑의 실체에 대한 어떠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진실은, 사랑에 관한 대부분의 질문들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만,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때만 풀 수 있는 수수께끼라는 점입니다.
앞서 ‘나 자신이 된다는 것’과 ‘부모가 된다는 것’ 편을 통하여, 건강한 애착관계를 통해 물려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심리적 자산이 인간의 입체성과 통합성에 대한 내면화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과 타인을 온전하게 한 인간으로 볼 수 있다면, 자신과 타인의 한계와 약점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건강한 내적 표상을 갖추지 못했다면, 사랑을 선택하고 지속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 되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며 스스로는 절대로 벗어나기 힘든 굴레에 휘말리게 됩니다.
“어쩌면 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같은 사람만 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같은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환상, 소망, 결핍...... 또는 다른 자신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건강한 애착관계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잘 분화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경험했던 건강한 관계를 편안하게 느끼고, 그에 걸맞는 대상을 찾아냅니다. 또한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잘 유지하며,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친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온전히 비춰주는 거울이 부재했고,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성장했다면, 사랑을 선택하고 지속하는 데에도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기회가 없었거나, 혹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불안정한 관계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학습한 셈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견딜 수 있고, 무엇을 견딜 수 없는지, 어떤 특성을 신뢰하고, 어떤 특성을 불신하는지, 어떤 때 안전감을 느끼고, 어떤 때 위협을 느끼는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혹은 외상적인 경험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신체적, 정서적 반응이 왜곡되어, 자신의 상처와 결핍을 자극하는 위험한 대상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따라서 많은 심리치료 이론에서는 초반에 강렬한 끌림으로 시작되는 관계를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경험에 대한 기준은 대뇌피질이 관장하는 이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 반응을 관장하는 원시뇌, 변연계에 각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맑은 정신으로 그럴듯한 이상적 선택 기준을 설정한다고 해도 그다지 소용이 없습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제 뜻대로 안 돼요.’가 바로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무의식적인 패턴에 사로잡혀 있다는 징후입니다.
관계에서 발생하는 대다수의 문제는 자기와 타인의 경계(borderline) 지키기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연하고 튼튼한 경계를 지니고 있다면, 타인과 때로는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때로는 먼 거리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또 따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연약하고 불분명한 경계를 가진 사람들은 타인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싫은 걸 싫다고 하지 못하고, 좋은 걸 좋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또는 반대로 타인에게 막무가내로 자신의 뜻을 강요하거나 무례하게 대하고, 타인의 안녕을 침탈하는 행위에 무감각합니다. 표면적으로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더라도, 극과 극은 통하기 마련이듯 이들은 본질적으로 불분명한 경계 문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가 되거나, 강렬한 끌림으로 서로를 잡아당기며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증오와 사랑, 이 둘은 대부분 같이 일어나지요. 한 사람이 두 가지 면을 동시에 지니기도 하고, 때에 따라 둘의 역할이 교체되기도 합니다.
흔히 자기중심적이고 무례한 사람과 자기 몫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만나 짝이 되고, 자기파괴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경계 혼란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흔히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애정으로 엮인 관계는 일반적인 관계보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가까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의 경계 혼란은 더욱 치명적이고 폭발적인 형태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혼란의 대서사시가 펼쳐집니다. 겉으로 보기엔 한쪽이 일반적인 희생양이라고 보이더라도,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서로의 불분명한 경계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갉아먹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관계 내에서 자기 몫을 책임지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니까요.
자기 자신이 관계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결핍이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비슷한 패턴의 관계를 반복해왔다면,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데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이는 무조건 상대를 멀리하고 피하라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를 선택하기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되돌아보는 내성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외모, 학벌, 직업, 경제력 같은 가시적인 지표밖에 없다면, 혹은 나를 얼마나 좋아 해주는지, 나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 같이 상대의 의지에 달린 것뿐이라면, 질문의 방향을 외부에서 내부로, 타인에서 자신으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전자의 것들이 덜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성격의 사람이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관계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과거 경험을 통해 찾아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다가올 관계에 대해 무조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발걸음을 뗄 필요가 있습니다.
한 발걸음 떼기로 마음먹었다면, 스스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해 주니까’, ‘빨리 답을 줘야 할 것 같으니까’, ‘상처 주기 싫으니까’, ‘요구를 거절하면 나를 떠날 것 같으니까’, '이런 나를 좋아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나의 진짜 모습을 알면 실망할 것 같으니까', '어차피 결국에 헤어지게 될 것 같으니까' 등의 이유에서 떠밀리듯이 선택하거나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면 즐겁고, 믿음이 가고, 같이 있으면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 느껴지고, 또한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지, 힘든 문제들도 같이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고, 상대의 저 정도 단점은 내가 감당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에 관한 선택은 오롯이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인터넷에 그 사람의 행동과 조건을 나열하며, ‘이 사람 만나도 될까요?’라고 물어도 뾰족한 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제3자가 접하는 것은 평면적인 정보의 조각일 뿐이지만,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은 그 모든 정보의 합보다 큰, 다층적인 면을 가진 입체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감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지금 당장 선택할 수 없다면, ‘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만나보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냈을 때, 상대로부터 어떠한 답이 돌아오는지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영역이고, 상대의 몫에 달린 것입니다. 만일 상대가 자신의 뜻을 존중해주고 속도를 맞추어준다면, 둘은 꽤 괜찮은 인생의 춤을 추게 될 것이고, 자신의 의사를 거절하고 본인의 속도를 고집한다면, 둘은 많은 난관에 부딪힐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상대의 반응을 보고, 그 이후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다시 자신의 몫으로 남겨집니다. 각자 자신의 몫을 다하며 서로 주고받는 상호작용 과정을 통하여, 관계는 깊이를 더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상대는 어떤 사람인지가 분명해집니다. 물론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에는 상대가 거절할 수도 있고, 이대로 관계가 끝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관계가 끝이 나더라도, 자신의 몫을 다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좋게 느낄 것이며, 상대는 상대의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존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충분히 공을 들여 판단을 내렸으나, 그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고, 자신의 선택을 번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그 관계를 지속할지 끝낼지, 그대로 둘지 어떻게든 풀어갈지를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습니다.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자신과 상대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알아갈 책임과 관계의 유지와 종결을 끊임없이 선택해야 할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을 외면하고, 과거 사랑의 맹세에 집착하며,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원망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대의 반응에 관심을 쏟기보다, 관계 내에서 자신의 몫이 무엇이고, 어떻게 내 몫을 다 할 것인지를 우선순위로 두어야만 불행한 관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하면, 자신의 선의는 늘 무참히 짓밟힐 것이며, 언제나 상처받는 위치에 자신을 놓아두게 됩니다. ‘왜 나는 가만히 있는데, 저들은 나를 힘들게 하는 걸까?’라는 억울함이 치밀어 오를 수도 있습니다. 세상 모두가 예의 바르고 이상적인 기준을 준수하며 굴러가면 좋겠지만, 그러한 완벽한 낙원은 어디에도 없고, 현실은 다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옥신각신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요. 개인은 각자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은 자신의 욕구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산 채로 죽어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무례한 침입을 막아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밟아도 꿈틀하지 않는 돌멩이를 편의에 따라 밟고 지나가는 것일 뿐이지, 대단히 나쁜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밟고 지나가는 행동이 정당하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려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살아 움직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무참히 짓밟고 지나간 상대에 대해, ‘그 새끼는 정말 쓰레기예요. 내 인생의 오점이에요.’라고 결론 내리고 잊어버리는 것은 책임과 자책을 덜어주는 간편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인지체계는 단순하고 분명한 것을 선호하고, 완결성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흑백으로 이루어진 이분법적 잣대로 빠르게 판단하는 것이 정서적, 인지적 소모를 덜어주는 편안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편하게 결론 내리고 덮어버린 경험들은 끊임없이 되살아나서 같은 선택을 반복하도록 자신을 몰아갑니다. 왜냐하면, 이분법적인 이야기에는 진실의 일부가 삭제되어 있기 때문에, 현실의 경험들에 직면하면 자꾸 현실과 맞지 않는 틀로 세상을 왜곡하여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은 정말 나쁜 행동이었어요, 그로 인해 저는 정말 상처받았죠. 하지만 또 그런 면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했던 거죠. 끌려다닌 데에는 제 책임도 있어요’라고 말하며, 대상에 대한 미움과 사랑을 마음속에 온전히 담아내는 것은 훨씬 더 고통스럽고 용기가 필요한 방식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진실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흑백보다는 회색지대가 훨씬 넓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끔 도와주는 밑거름이 됩니다.
오이디푸스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랑의 대상을 선택한 인물일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친부(인지 몰랐던)를 살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의 왕이 되었으나, 친모(인지 몰랐던)를 아내로 맞이하고, 그 대가로 테베에는 역병이 창궐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널리 알려진 오이디푸스 신화는 단지 남아가 어머니를 사랑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하는 패륜적인 근친상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프로이드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정신분석의 주요 주제로 차용한 것은, 오이디푸스 신화 전체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진실의 투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이디푸스의 친부모는 새로 태어날 왕자에 의해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남편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외면했기 때문에, 신탁의 예언을 빌미로 오이디푸스를 버렸고, 결국 자신들의 두려움을 실현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부모(사실은 자신을 길러준 양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 죽일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외면했기 때문에, 친부모라 믿었던 양부모를 떠나, 비극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진실이 드러났을 때, 끝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친모이자 아내였던 조카스타는 자신의 눈을 찔러 자살했습니다. 눈을 찌름으로써,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신들이 자신을 위해 ‘이 자는 신탁의 희생자일 뿐’이라고 변호했을 때에도,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한 일입니다’라고 자신의 몫을 받아들였고, 결국 말년의 평화를 찾고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편,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아침에는 네 발로,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의 정체)를 풀 수 있었던 것은, 친부모로부터 버려질 때 발등에 못이 박힌 채 버려졌기 때문에, 일평생 자신에게 남겨진 흉터의 의미를 다른 사람보다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세상으로부터 던져진 질문의 답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아내었고, 자신의 몫을 받아들임으로써 운명에 끌려가는 희생자가 아닌, 운명을 끌고가는 주체로 거듭났습니다.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배우지 못하고, 자멸적인 관계를 반복하고 있다면, 사실은 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고통을 온전히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 관계 내에서 매우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마음 한켠에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을 거야’, ‘저 사람이 달라졌을 수도 있잖아.’ 같은 실낱같은 소망에 매달리며, 새드엔딩이 예정되어 있는 과거의 시나리오를 이번에는 다시 쓸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부여잡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그 소망과 환상은 과거의 한때에는 자신을 살린 안전장치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내려놓는 데에는 엄청난 공포와 상실감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그 공포와 상실을 온전히 느끼며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일 때에만, 이어지는 시나리오의 새로운 챕터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참조
Bruno Bettelheim 저, 프로이드와 인간의 영혼, 하나의학사
Jeffrey E. Young 외 3명, 심리도식치료, 학지사
Otto F. Kernberg 저, 남녀관계의 사랑과 공격성(Love relationships, Normality and Pathology), 학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