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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forter Oct 28. 2022

나 인간 좋아하는 거였네

 우울과 불안에 취약하고, 가끔은 쓸데없이 예민하며, 극 내향성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다. 게다가 근 몇 년 간은 병원 퇴사와 코로나 시국이 겹치면서 사람 만날 일이 극히 줄어들어, 누군가를 만날 일정이 생기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매일 출근하며 꾸역꾸역 할 때는 사는 게 원래 이런 건가 보다 했지만, 집안에서 보내는 아늑한 시간이 늘어갈수록,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고역이 되었다. '내가 스트레스에 이 정도로 취약한 인간이었나?' 새삼 놀랄 정도로. '나의 본성은 생각보다 훨씬 더 세상살이에 적합하지 않구먼.' 이런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배우자는 혀를 내두르곤 하였다. "인간을 렇게 싫어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하지?"

 "그러게... 의외로 싫어하는 게 아닐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인간을 싫어한다'는 가설을 검증해보기로 하였다.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아보도록 한다. (1) 인간과 접촉하면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 외출할 때는 무조건 사람이 가장 덜 붐비는 시간과 장소를 고르거나, 모르는 전화번호는 절대 받지 않는다 등등. (2) 어릴 때부터 '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꾸준히 들었다. 낯가림이 심하고, 나보다 어린 동생들을 예뻐하지 않으며, 애교가 부족하고, 연락을 잘하지 않는다 등등. 근거를 늘어놓고 보니 그게 꼭 인간을 싫어해서는 아닌 것 같다. (1)은 사실이지만 내향성이 곧 인간 혐오의 동의어는 아니고, (2)는 이제 와서 볼 때 진짜 자기상이라기보다는, 많은 부분 부모가 원하던 모습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그들의 푸념이 내면화된 것 같다.


 그럼 이제 반론을 제시해본다. 사회적 욕구가 좀 낮은 것 같긴 하지만, 나를 면밀히 관찰해봤을 때, (1) 월 1-2회 정도의 친교 모임이 필요하다. 장기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 수다를 떨지 않으면 급격히 우울해지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오면 또 힘을 내서 살아간다.  (2) 내담자 및 환자를 만나는 것은 의외로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조용한 공간에서 일대일로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때, 세상에 둘 밖에 없는 것 같은 고요함을 좋아한다. (3) 마음이 통하는 찰나의 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몇 달간 사회 활동을 쉬다가, 오래간만에 상담 관련 워크숍을 듣게 되었다. 수강생 중 몇몇이 집단상담 시범을 보이게 되었는데, 무슨 용기가 샘솟았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거기 참여하고 있었다. 리더가 지금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나누어 보라고 했을 때, '나는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나의 이야기를 경청해줄 것을 알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어차피 이 만남이 끝일 것이고, 다시 볼 일도 없을 텐데,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냐고. 몇 달간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있던 시기였고, 인간에 대한 나의 태도는 다시 냉소 모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리더가 내가 원하는 것이 뭐냐고 물었을 때, '원하는 것'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여 눈물을 쏟았다. '오... 수백명이 보는 앞에서 이게 뭐하는 거지?' 너무 느닷없는 눈물이어서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워크숍의 말미에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 단 한 번의 인연일 뿐이라도, 지금 이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마음이 통한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이렇게 사람들과 만나고 마음을 나누는 것,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접촉의 경험 후 나는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이 경험이 앞으로 평생 지속되지 않더라도, 이 경험은 내 안에 실재한다. 늘 누군가와 항상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불연속적인 접촉의 감각을 기억할 수 있으면 살아갈 힘이 생긴다. 마음이 통하는 순간을 함께 쌓아온 그들 중 몇몇은 내가 진짜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나의 곁에 있어줄 것이고, 나 또한 그럴 것이다. 부모님은 나에게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라고 했지만, 나는 이제 그 명제를 거부하기로 했다. '전부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믿을 사람도 있지 않겠어요?' 믿음이 배반당하는 날이 오더라도, 믿음의 순간들이 나를 살렸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지난 주말에 잠깐 서울에 들리러 온 친구를 4년 만에 만났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우리는 편안했고, 무지 반가웠다. MBTI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나는 내가 어떤 유형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냐고. 나는 너를 따뜻한 사람으로 느낀다고 했더니, '너한테는 따뜻하겠지만,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쌀쌀맞게 대하겠지'라고 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너도 나한테는 따뜻한 사람이야. 지금 엄청 잘해주니까 무지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 같다'며 깔깔 웃었다. 그 말은 기분이 좋았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야. 저기요. 나에게도 따뜻한 면이 있다고요!'    

 써놓고 보니 이 정도면, 인간을 좋아하는 거 아니냐? 이 글을 쓰는 것만 해도 그렇다. 꾸준히 글을 쓰고자 마음을 먹었지만, 좀처럼 쓸만한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을 쓸까 고민하는 와중에, 글을 쓰고 싶을 만큼 인상적인 일들은 모두 '사람'을 만났을 때 느낀 경험들이었다. 융은 '두 사람의 개성의 만남은 두 가지 화학물질의 접촉과 같다. 반응이 있으면 둘 다 변화한다'고 했다. 만남의 순간, 우리는 변화하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그 접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땡땡이는 꼬마 현자 같은 말을 자주 한다. 한 날은 어린이집 선생님이 키즈노트에 땡땡이의 일화를 남겨주었다. 어린이집에서 반 친구들과 함께 관악산에 산책을 갔는데, 물웅덩이에 개구리알이 잔뜩 있었다고 한다. 몇몇 아이들이 돌로 쳐서 개구리알을 깨워주자고 하자, 땡땡이가 그들을 만류했단다.

 "안 돼. 모든 생명체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면역력이 떨어져서 죽어."

  생물의 한살이를 열심히 보더니 생명의 원리를 깨우치기라도 한 것일까,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지 싶었다. 땡땡이의 말은 맞는 말이지만, 한 가지를 더 알려주고 싶다.

  "맞아.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해. 하지만 알에서 깨어난 올챙이는 친구 올챙이들을 만날 거고, 함께 개구리가 될 거야."

  그런데 개구리가 군집 생활하는 게 맞나?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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