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500만원을 결제했다.
늦가을 저녁, 회사로 복직해서 직장인 모드로 적응 중인 나날들이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출퇴근 시간마다 각종 시험 합격 수기를 읽으며 학원의 명성을 따졌다.
이왕이면 이름 있는 곳이 체계적이겠지.
유명한 학원에 보내면 모두 서울대를 갈 것 같은 부모의 마음이, 그때의 나와 비슷했을 것이다.
검색창에 'AICPA 학원'을 쳤다.
가장 상단에 뜨는 이름.
교대역 1번 출구, 도보 10분.
명성보다 위치가 마음에 들었다.
회사와 가깝고, 집으로 가는 방향이다.
상담이라도 한 번 받아보자는 생각으로, 별다른 계획 없이 학원을 찾았다.
늦가을 치고는 유난히 찬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코끝이 얼얼했다.
길을 몰라 핸드폰 지도를 켜고 화면만 보고 걸었다.
대로변은 올리브 영, 맥도날드의 화려한 레온사인이 줄지어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걸 볼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눈을 감고도 훤하게 그려지는 길이지만, 그땐 몰랐다.
이 길이 언젠가 집에 가는 길처럼 편안해질 거라는 걸.
화려함이 사그라들 즈음, 작은 골목 안 4층짜리 건물이 나타났다.
저녁 8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는데도 층층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불빛이 든든해 보였다.
1층 카운터에 들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기요. 상담을 좀 받고 싶어서 왔는데요.”
“저기 테이블로 가실까요? 어떤 자격증에 관심이 있으세요?”
“제가 AICPA 공부를 시작할까 하는데, 직장인이라서요.
직장인들도 많이 하나요?
하루에 얼마정도 시간을 투자 하면 될까요?”
상담직원은 웃으며 말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하루 2시간만 꾸준히 2년 정도 하시면 누구나 하실 수 있어요”
그 말과 함께 커리큘럼이 담긴 책자를 건넸다.
과목당 2개월씩, 온·오프라인 병행 수업.
직장인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설명은 길었지만, 내 심장에 꽂힌 단어는 단 두개였다.
‘하루 두 시간’
‘누구나’
그 시기의 나는, 무언가를 더 잘 해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대로 멈춰 있는 나를 견디기 힘들었다.
밤이 되면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았고, 잠자리에 누우면 내일도 오늘과 같을 거라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그래서 ‘하루 2시간’이라는 말은 계획이 아니라 구원처럼 들렸다.
전부를 바꾸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락,
지금의 나를 부정하지 않고도 시작할 수 있다는 말.
불면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자던 시기였다.
‘하루 2시간 정도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속으로 생각했다.
“하루 2시간씩 2년이면 되는거죠?”
“네. 그래서 직장인분들도 회사 다니면서 많이 도전하세요.
AICPA라면 정말 회사 내 경쟁력에도 확실히 도움이 될 거에요.”
나는 원래 결정을 신중히 하는 편이라, 상담만 받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정신 차려 보니, 내 두 손에는 5백만원 가까운 카드 명세서와 두툼한 책더미,
그리고 수업 시간표가 들려 있었다.
분명 쌀쌀한 늦가을이었는데, 학원을 나설 때 온몸에 뜨거운 온기가 돌았다.
학원의 난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마음이 달아올라 있었던 걸까.
통유리 창으로 보이는 내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가끔 그 날을 떠올리며 웃는다.
조금만 더 꼼꼼히 묻고, 프로그램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시작할 수 있었을까 싶어서다.
‘하루 2시간’에는, 그때의 내가 묻지 않았던 조건이 숨어 있었다.
수업시간이 아니라, 개인 복습 시간이 하루 2시간이었던 것.
어쩌면 무모한 결정 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보면, 도약하기 전에 모든 걸 알 필요는 없었다.
모든 조건을 다 이해한 뒤에 시작했다면
나는 아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을 것이다.
도약은 준비가 끝난 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로 한 순간에 시작된다.
그날의 선택은 내 이력을 바꾸기 전에 내 호흡을 바꿨다.
나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AICPA #학원 #2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