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이야기

다시 돌아간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by 공유쓰

첫 생일도 아직 맞지 못한 어린 딸과 살다보니 매일이 전쟁이다. 이른 밤, 아이를 재우고 나면 그제야 내 마음과 우리 집에 평온이 찾아온다. 직장과 육아에서 모두 퇴근하고 나면 이제 겨우 한 숨 돌린다. 티비를 켜고 빨래를 개며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다. 티비 프로그램은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오늘의 티비 속에는 유명인이 나와 울지도 웃지도 못해하고 있다. 그의 과거 굴욕적인 사진을 보면서 출연진들이 웃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저 사진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한다.


저 유명인의 굴욕 사진처럼 우리는 순간만을 기억한다. 긴 이야기는 다 기억하기 힘든 때문일까. 한참 지난 일이 번뜩 생각 날 때면 기승전결이 뚜렷한 긴 이야기보다는 강렬했던 어떤 한 순간이 머리를 채운다. 이렇게 떠오르는 순간들은 행복하고 따뜻하기보다는 부끄럽거나 후회되는 순간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다음날 제출할 과제는 아직 손도 못 댄 비오는 수요일, 막걸리를 먹으러 가자고 조르는 후배의 보조개가 너무 예뻤던 순간,
너무나 힘들게 도착한 9급 공무원 최종 면접시험, 수십 번 외운 문제가 나왔는데 순간 하얗게 탈색된 머리와 떨어지지 않는 입… 그 길로 독서실로 돌아가야 했던 절망의 순간,
발갛게 부은 눈으로 지하철역 반대편 승강장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던 그녀를 멍청히 곱게 보내버린 그 길고 길었던 순간….


묻고 싶다. 정말로 문제는 그 순간이었나.
이렇게 문득 떠오르는 순간들은 마치 여행 중 찍은 사진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놓고 그 사이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이어 붙여 여행 전체를 기억하듯 우리 살아온 이야기도 사진처럼 순간만 기억나는 법이니, 순간의 앞과 뒤에 붙어있는 이야기들을 떠올려내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리고 지금은 짐작밖에 못할 앞, 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건 나 자신이라는 것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오그라들거나 원통한 그 순간까지 도달해낸 노고와 선택의 그 순간 속 나는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를 기억해 내는 것도.


빛나는 보조개와 막걸리를 한잔 하지 않았어도 밤새 과제를 하진 않았을 나였다는 것. 통한의 최종면접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의자 위에 앉아서 보냈던가, 그 격렬했던 전투와 엉덩이의 물집들을 떠올리는 것. 돌아선 그녀의 손목을 재빠르게 잡아챌 수 없었던 그 때의 이야기와 멀어지는 뒤통수를 바라보던 내 눈에서 흐른 짠 물…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의 책임을 온몸으로 져냈던 내 손을 잡아주는 것. 잘 보냈다, 하고 쓰다듬어 주는 것 까지. 내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순간만이 아니다. 순간만 기억하고 넘어 가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내 마음 속의 그 어떤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의 나 역시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 당장 누군가가 나를 그 순간으로 보내준다고 해도 선택 한 번 다시 함으로 삶을 바꿀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쉽게 쌓아올린 삶이 아님을 이제는 알고 있다.


쓸 데 없는 순간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순간들이 모두 모여 만든 집합체이다. 과거의 힘들었던 나를 안아주고 다가 올 하루를 다시 꽉 꽉 채워서 살아낼 책임을 온전히 다 지고 있는 기특한 나. 내일은 저녁에 삼겹살이라도 구워 이런 나를 격려해 줘야겠다.
티비 속 저 유명인도 모두의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 굴욕 사진으로 유명세를 타지 않았다면 오늘 내가 보고 있는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수한 갈림길을 거친 길도 돌아보면 결국 한 길이었다.


2016.6.26 / 20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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