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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Sep 04. 2022

셀프 인테리어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면서 현관문과 베란다 창문, 화장실 틀, 거실 천장을 페인트칠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었다. 오래된 체리 색은 낡고 오랜 집을 한층 더 침침하고, 어둡게 했다. 화장실은 문짝을 바꿔서 괜찮았지만, 천장의 몰딩, 기둥, 문 3개는 여전히 체리 색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셀프로 다시 페인트칠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게 칠해야겠다고 생각한 지 6년 만에 페인트 붓을 들고 페인트칠을 헸다.


기관지가 좋지 않아 페브리즈, 홈키파 등 에어졸에서 나오는 것들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킨다. 희한하게 에어졸 형태에서 심하게 반응하며 기침한다. 에어졸 형태의 특정 화학 약품에 대한 반응 같다.


그런 이유로 홈키파를 잘 쓰지 않고, 모기향을 핀다. 기관지가 안 좋고, 알레르기가 조금 있는 몸 때문에 6년 전 친환경 페인트로 셀프 인테리어를 했었다.


친환경 페인트는 바를 때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기침하지 않았다. 기침하면 어떡하나 걱정을 안고 페인트를 칠했지만, 친환경 페인트는 기침을 유발하지 않았다. 냄새도 전혀 없었다. 기침이 무섭다. 기침할 때 힘들다. 십 대 시절에는 자지러질 정도로 기침했다. 기침을 해결하기 위해 기관지에 좋다는 수세미를 직접 재배해서 건강원에서 내려 먹고, 도라지며, 배를 함께 갉아먹는 노력을 한 덕분인지 십 대 때처럼 심하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기침과 재채기 등으로 힘들어하기 때문에 종종 기침과 재채기가 찾아올 때면 무섭다.


6년이 지난 지금도 비싸더라도 친환경 페인트를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6년 전 구매했던 회사의 같은 색 페인트를 구매해 칠하고 싶었다.


그 회사의 홈페이지에서 내가 발랐던 흰색을 찾았지만, 흰색이 너무도 많아 찾을 수도 없었고, 흰색 안에서의 색깔 차이를 잘 구분하지도 못했다. 이 세상 하얀색을 모두 그곳에 가져다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많았다. 이미 6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회사에서 구매했던 흰색 코드번호도 잊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름지가 벗겨지는 이십 년 된 문짝을 그냥 둘 수 없었다. 하필이면 지금인지 나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인디영화관에서 오래간만에 영화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집 주변에 있는 페인트 가게를 검색했다. 찾은 페인트 가게에 들러 일단 가격대만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갔다가 3개 문을 칠한 젯소, 흰색 친환경 페인트, 각종 도구를 사 왔다.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오후 7시부터 시작해 오후 11시가 넘은 자정에서야 칠하고 싶었던 부분에 젯소를 다 발랐다. 젯소를 다 바른 후 체력이 바닥 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변을 정리하고 잘 마르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누우니, 갑작스럽게 페인트 구매한 일이 너무 잘한 일이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나의 행동에 스스로 손뼉 쳐도 마땅한 하루다. 스스로에게 매우 옹색한 편이지만, 오늘은 칭찬해도 좋은 날이다.


예고 없이 그저 마음이 움직이는 데로 움직일 때, 생각지도 못한 세상을 만날 때가 있다. 오늘처럼 말이다. 몇 년간 고민만 하던 페인트칠을 하필이면 지금에서야 하고 싶었을까. 나도 나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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