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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Sep 10. 2022

느티나무 아래 청인약방

토요일 7시 으레 김영철의 동네한바퀴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엄마와 나는 여행을 즐기고 좋아한다. 갑자기 떠나자는 말과 함께 가방을 챙기는 딸의 급작스러운 결정에도 흔쾌히 수락하고 여행길에 오른다. 이십 대 시절에는 대부분 친구와 놀러 다니느라, 엄마와의 여행을 생각하지 못했고, 엄마와 여행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동차가 없을 때는 여행지의 교통편부터 시작해서 주도적으로 일정을 계획하며 친구들과 국내 여행을 다녔고, 자동차가 있었을 때는 시간만 되면 우리나라 이곳저곳을 다니려고 했다. 그땐 엄마와의 여행은 없었다. 지금은 자동차가 없어 여행이 어렵지만 가끔 차를 빌려 다닌다.

      

서른이 넘어가고 슬그머니 엄마하고 여행하지 않았던 나를 떠올렸고, 그쯤부터 시작해서 일 년에 한 번은 엄마와 여행을 가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했고, 나의 마음속 다짐을 매년 실천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나는 엄마하고 여행을 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 부분은 잘한 나의 행동이라 생각한다.      


엄마하고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나의 여행 동반자는 엄마였다. 주변 친구들이 전국에 흩어져 살았고, 대부분은 시집을 가서 같이 여행 갈 친구도 없었다. 혼자서도 여행을 잘 가는 편이었지만, 엄마와의 여행도 즐거웠다. 혼자 다닐 때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이야기 나눌 존재가 없었는데 이야기할 존재가 있다는 것이 덧없는 행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갑자기 어디론가 가자는 나의 결정에 엄마는 잘 받아주었고, 우리는 함께 여행을 다녔다. 단양, 문경, 충주, 고흥, 부안, 예산, 아산, 횡성, 태안, 속초, 강릉, 고성, 인천 강화군, 경주, 담양, 제주도 등 엄마와 함께한 여행지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여행하는 지역을 하나둘씩 늘려나갔다. 그런데도 늘 더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고 싶었고, 여전히 가보지 못한 국내 여행지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일까 국내의 우리가 모르는 다른 지역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어서인지 여행 프로그램을 둘 다 선호하는 듯하다.     


EBS 한국기행, 건축탐구 집, 세계테마기행, 걸어서 세계속으로, 신계숙의 맛터사이클 다이어리 등 종종 여행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그러나 거의 빼먹지 않고 보는 프로그램이 김영철의 동네한바퀴였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여행을 하셨겠지만, 엄마와 나 모두는 김영철 아저씨의 진심을 느꼈다. 동네한바퀴를 찍으면서 배우 본인도 단순한 여행 프로그램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모습이 느껴져 정이 갔다. 궁예로 나오는 사극을 보지 않았지만 강렬한 궁예 이미지로 인해 성격이 괴팍할 것 같았는데 방송을 보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김영철 배우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머니 같은 분을 만나면 그냥 스쳐 지나치지 못했고, 길에 지나가는 고양이나 강아지에게도 말을 걸었다. 우리랑 비슷한 행동이다. 나와 엄마는 오늘도 길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정감 있는 김영철 아저씨가 프로그램을 관두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면서 솔직히 프로그램을 잘 챙겨보지 않는다. 여행 프로그램도 누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사람이 바뀌면서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 오늘 엄마와 나는 토요일 7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오늘의 지역은 충북 괴산이었다. 계속 앉아서 시청하지 못했지만 나는 청인약방을 운영하는 아흔 살 할아버지를 보면서 멋진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청인약방이 개업할 당시인 1958년만 해도 시골에 약방은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흔하지 않은 시골에서 약방을 운영할 결심을 하고, 1958년부터 지금까지 느티나무 아래 한결같이 운영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에 감동했다.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다. 나는 직업에 대한 고민으로 잦은 방황을 했고, 지금까지 한 가지 일을 꾸준하게 하지 못해, 평생 한 가지 일을 지속해 온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과 부러움이 있다.      


할아버지의 약방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허약한 체질로 한약방과 병원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그중 동네에서 약을 지어주는 할머니 집도 꽤 들락거렸다. 초등학교 시절 시골 리 단위 마을에서 살았던 나의 동네는 구멍가게 하나 정도 외에 어떤 편의시설도 없었다. 당연히 약국도 없었다. 급하게 아플 때 곤란했다. 그나마 다행히 동네에 약을 지어주시는 할머니가 있어서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할머니가 없었다면 아픈 상태로 밤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할머니 집에 엄마와 함께  약을 지어  기억이 여전히 있다. 하얀 백종이를 펼쳐 알약을 곱게 갈아 넣고, 예쁘게 접어 겹겹이 쌓은 약을 주셨는데, 나는 할머니가 지어주신 약들을 먹고 많이 나았다. 지금은 약국 아닌 곳에서 약을 지어주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  우리 동네는 그랬다. 이런 경험을 했지만 나는 아직 젊다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전 일은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36전쯤은 되는  같다. 그런데도 정말 우리나라가 단기간 안에 급격히 경제가 발전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의 추억은 너무  옛날이라고 치부될  있지만 그리 나이를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괴산 청인약방 할아버지를 보면서 어린 시절 줄기차게 찾아다녔던 한약방과 약을 지어주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잊힌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 온 것 같아 기분 좋았다.


그 옛날 사람들은 얼마나 느티나무 아래 약방 운영하는 할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꼈을까. 병원 가기도 힘들었던 마을, 길도 교통편도 제대로 되지 않아 병원을 다녀오기가 힘들었던 그 마을에서 당시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약방은 마을 사람들의 병 치료는 물론 마음의 위안을 주는 따뜻한 곳이 아니었을까. 아흔 살 나이인 지금도 약방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쪽이 따뜻함이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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