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그립다
혼자 과감히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혼자 외갓집을 다녔던 것이 큰 계기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다섯 시간 이상 걸리는 이동거리를 대중교통을 타고, 오롯이 가방 하나 들고 혼자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엄마는 어린 나를 왜 혼자 보내려고 했을까? 늘 궁금했다. 다 큰 성인 돼 그 시절 왜 나를 혼자 보냈냐고 물어보면 왜 혼자 외갓집을 보냈는지 말하지 않는다. 워낙 말이 없는 성격이라고 치더라도 서운하다. 하지만 그것은 엄마가 나를 위한 선택이었으리라. 어린아이가 방학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눈치 없이 외가에서 하고 싶은 데로 마음껏 뛰어놀고, 편히 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 짐작된다. 그래서 그 멀고도 험난한 여정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것이다.
외갓집에 가면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공기놀이, 숨바꼭질 등 언제나 놀이거리로 넘쳐났다. 할머니가 손수 만든 술 빵, 서산의 대표적인 토속음식이 게국지 등 할머니만이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을 게눈 감추듯 먹었다. 소소한 일상들로 채워진 하루하루를 근심 걱정 없이 보냈다. 엄마도 내가 그렇게 방학을 보내기를 진심으로 원했을 것이다.
1986년 초등학교 1학년 때 도로포장 상태는 열악했다. 울퉁불퉁한 흙길이 아닌 길이 없었고, 비가 오면 운동화는 흙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망가지기 일쑤였다. 그나마 면 소재지로 나가야 포장된 도로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이면 다양한 방법으로 운전해 편안하게 외가를 갈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내가 사는 마을에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집은 꽤 부잣집으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했던 우리 집은 병원을 가거나 일을 보러 나가려면 당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외갓집을 가는 역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대중교통 시스템이 발달이 잘 안 돼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외갓집으로 향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외갓집을 보낼 때 엄마는 끈이 달린 지갑을 챙겨주셨다. 나는 겉옷을 입기 전 지갑을 옆으로 메고 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최대한 꽁꽁 싸맸다. 돈을 잃어버리면 곤란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어린아이도 생각했었던 것이다. 어린아이 혼자 먼 거리 보낸 엄마가 강심장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강심장이었던 것일까. 돈을 잘 숨기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탈 때 항상 운전기사 뒷자리에 앉았다. 운전기사 아저씨 뒤에 꼭 붙여서 가라는 엄마의 말을 잘 들었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나의 길을 잘 인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버스를 타기 전 언제나 나의 손에는 운전기사 아저씨와 나눠 먹을 껌이 있었다. 껌을 건네면 말이 시작되고, 어느새 아저씨에게 나의 목적지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아 안심하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운전기사 뒷자리는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로 앉아있었는데, 외갓집에 혼자 버스 타고 가는 나를 칭찬해주며, 종종 자신의 먹을 것을 내어주곤 하셨다. 소도시와 소도시를 정차하는 사이 나의 옆자리는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한다. 그 덕분일까, 나는 여행할 때 낯선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거나, 말을 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양한 질문거리들이 자연스럽게 생각나고, 질문으로 시작된 대화는 무르익어간다. 때때로 길 위에서의 만남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인연으로까지 발전되는 일도 있다.
나는 홀로 떠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시대에도 혼자 여행을 떠났다. 지금처럼 혼밥, 혼술이라는 말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사람들을 상관하지 않고 혼자 잘하고 다녔다. 음식점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혼자 밥을 먹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느껴야 했지만 어린 시절 다져졌던 경험으로 나는 나만의 시간을 즐기려고 했다.
이런 내가 가능한 이유는 어린 꼬마가 다섯 시간 이상 길 위해서의 다양한 경험이 성장하면서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이 든다. 지금은 어린아이를 길 위에 홀로 보내는 일은 상당히 위험천만한 일이다. 만약 내가 2000년대 출생한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지금과 사뭇 환경이 다른 시대에 태어나 긴 여행을 할 수 있어 지금에 나는 가끔씩 혼자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역시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