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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Jan 21. 2021

인간처럼 기계도 따뜻한 온도가 필요한 걸까

제법 프린트할 자료가 있는 어느 날, 온종일 기계와 씨름을 해야만 했다. 한 장이 들어가면 뒤이어 한 장이 겹쳐 들어가 버리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처음에는 ‘한 번 정도 그러고 말겠지’하고 편안하게 생각했지만, 그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똑같은 현상이 지속되었다. ‘아니겠지’라며 중얼거리던 나를 무참히 짓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끈을 놓지 못하고 ‘아니겠지’를 반복하며 뒤이어 들어가 걸린 문제의 종이를 일일이 프린터를 열고 종이를 있는 힘껏 당겼다.      


99장의 자료를 출력해야 하는데 이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니 암담했지만 99장을 끝까지 프린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프린터와 결투를 벌였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는 마음이었다. 어느 한 명은 이겨야 끝나는 스포츠 경기처럼 프린터와 상대하며 밀고 당기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툭툭 쳐보기도 하고, 전원을 꼈다가 다시 켰다가 반복하기도 하고, 선을 뽑아버렸다가 다시 선을 꽂아다가 별의별 짓을 다 했다.     


도무지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 프린터 서비스센터에 전화하니, 아뿔싸 12시 점심 가까이 전화를 해버렸다. 점심시간 이후 전화하라고 했는데 너와 사투를 벌이느라 서비스센터에 전화하는 것을 깜박 잊어버렸다.   



프린터는 쉽게 나에게 굴복할 기세가 아니었다.    

  

‘아니 너 왜 그래, 너를 너무 오래 써서 그런 거니’


그러고 보니 2006년도에 산 이 프린터기를 지금까지고 사용 중이다.      

그간 기름칠을 안 해줘서 그런가 싶어 프린터를 열고, 토너를 빼고 주방에서 옥수수 식용유를 꺼내 키친타월에 묻혀, 쇠붙이로 보이는 부품에는 죄다 꼼꼼히 발라줬다. 반나절 마를 시간을 주고 다시 프린터 했으나 너는 변함이 없었다.      

  

기름칠해도 안되면 난 어떡해야지, 갑자기 프린터를 사야 하나 싶어, 인터넷으로 프린터 기기의 가격을 찾아봤다. 네가 아파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것저것 찔러도 보았지만 딱히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99장의 자료를 출력해야 해서 다시 프린터를 켰다. 잔머리가 돌았다. 두 번째 종이가 공급될 때, 프린터 서랍에 있는 종이 뭉치를 죄다 잡고 뒤로 뺐다가 시간 간격을 두고 밀어 넣었다. 그렇게 나는 어렵사리 99페이지를 프린트했다.       


   

그러나 그다음 날에도 너는 바뀌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쓸 수 없었다. 근데 뾰족한 해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겨우내 네가 차가운 베란다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혹시 차가운 날씨에 네가 아픈 것은 아닐지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짐작한 내용이 확인됐다. 프린터기가 차가워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유레카를 외쳤다.



따뜻한 방에 너를 며칠째 놔두었다. 따뜻한 방에서 나와 며칠을 있었던 너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프린터를 켜고 프린트를 시도했더니 너는 원래의 너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프린터를 다시 사야 하면 어떡하지 했는데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쓸어내린 가슴을 주워 담았다.       


   

‘너도 차가운 것을 싫어하는구나!’

‘나도 추위를 잘 타는데’    


      

거의 15년을 쓰면서 미처 너도 적정온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참 관심이 없는 주인을 만나 올겨울을 고생하는구나 싶었다. 기계도 차가운 것보다 적정한 온도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정상체온이 36.5도로 이 이상을 넘으면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데, 기계에도 그런 온도가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기계인 너도 적정온도가 있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핸드폰도 추운 날씨에 갑자기 꺼졌다가 실내로 들어오면 멀쩡하게 작동한다. 기계 역시 인간과 같이 적정한 온도가 자신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을 아닐까 라는 깨달음을 프린터, 네가 주는구나.   



  

따뜻하게 며칠 해줬더니 정상 작동해준 너에게 고맙다. 나와 몇 년은 더 같이 있어 줘. 너는 나에게 중요한 일을 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니 조금 더 견뎌주기를. 이제 너무 차갑게 너를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신경 써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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