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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항아리 Jul 16. 2021

나의 후원자

풍족하지 않은 환경에 나는 창피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성실했고,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크게 상실감을 갖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고,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고 창피하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유치원을 다니는 친구를 기다리거나, 학교 수업이 마치고 학원 차량에 올라타는 친구들을 보면서 잠깐씩 부러워하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성인이 되자 내가 살아온 어린 시절의 삶을 창피해했고, 굳이 말할 필요도 느끼지도 않아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시대에 그런 환경 속에서 산다면, 그때처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지 못한다. 내가 성장할 때만 해도 그다지 그런 것 이유로 위축되거나 소심해지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나는 어린이재단을 통해 후원자를 만나 소통했었다. 당시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거주했던 후원자였고, 나는 후원자와 간헐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서 상당히 언어발달이 늦은 아이였던지라 편지 쓰는 시간이 고통스러웠지만, 내겐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다. 편지를 보내면, 후원자의 답장을 애타게 기다렸다. 어릴 적 음력 10월 14일로 생일을 잘못 알고, 한 동안 지냈는데, 잘못 알고 있던 그 생일이 나와 같았다. 편지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잘못된 생일인지 몰라 그저 같은 생일인 이유만으로 후원자와 내가 보이지 않는 끊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씨도 잘 쓰고, 마음도 고운 후원자가 나는 좋았다.



어느 날, 어린이재단에서 주관하는 아동과 후원자가 함께하는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내 얼굴을 보고 싶다며 참석 의사를 전해오셨다고 어린이재단 담당 선생님에게 연락을 받았다. 후원자와 가족을 만나는 전날, 가슴은 두근거렸고, 혹시나 나를 보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에 밤잠을 설치고 만나려 간 날, 걱정했던 일이 무색해질 정도로 나를 따뜻하고, 편안하게 맞아주셨다. 후원자, 남편, 아들 모두가 나를 환대해주셨다. 나에게 무슨 복이 있길래, 이렇게 좋은 분이 다가왔을까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어졌다가, 십여 년 전 우연히 두어 번 문자로 연락이 되었는데, 그간 고생이 말할 수 없이 많은 듯했다. 문자의 내용은 짧았고, 상세한 내용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느껴졌다. 남편이 세상을 빨리 떠난 것 것 같았다. 체육대회 때 남편과 아들을 함께 봐 알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후원자 가족사진 보관하고 있어 후원자의 남편 모습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전달받은 메시지를 보면,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는 듯하지만, 나에게 슬픔이 느껴졌다. 그 슬픔이 나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래서 슬펐고,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 당장 달려가지 못했다. 다시 잠깐 연락이 되었을 때,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었는데 나는 왜 찾아뵈려고 하지 않았을까 지금에서야 후회된다. 몇 번의 핸드폰 번호를 바꾸면서 후원자의 연락처도 사라져 버렸다. 이젠 도무지 연락할 길이 없다.      


후원자가 매달 보내준 돈을 모아 책상을 사 공부했고, 지금은 형편상 잠정적으로 기부를 중단했지만 후원자 덕에 나 또한 어린이재단에 기부를 했었다고. 당신의 헌신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 덕분에 불우했던 어린 시절, 당신은 나의 희망이었고, 외로웠던 그리고 힘겨웠던 나를 버티게 해 주었다고. 그 모든 것은 당신으로부터 출발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갑자기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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