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환상을 만나는 날

<천공의 성 라퓨타>

by 배석준

지브리의 영화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초여름 날씨가 약간 더울 때, 그날 햇빛이 너무 좋았을 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어떤 영화를 볼까 생각하다보면 꼭 마지막에는 지브리의 영화를 선택하는 나 자신이 보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점은 그렇게 영화를 택했을 때, 단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 1.jpg 파츠가 사는 집



가장 먼저 봤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아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었을 것이다. 이후 “모모노케 히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웃집 토토로”까지도 봤던 것 같은데, 찾아보니 아직도 보지 못한 영화가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어떻게 보면 감사할 일이다. 아직도 감동에 빠질 영화들이 남아있다는 뜻이니까.

지브리의 영화를 보다보면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스팀 펑크나 중세 판타지처럼 서양의 전통적인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일본어를 사용하는 등장인물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토대로 형성된 세계관 자체에 흠뻑 빠져들어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 그리고 끝내 영화의 막이 내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한동안 다른 영화를 보기가 힘들다는 점. 개인적으로 하루에 영화를 두 세편씩 몰아보는 경우도 많은데, 지브리의 영화를 본 날이면 그게 잘 안 된다. 아마 남은 여운을 좀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보면 좀 신기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마음이 가라앉고 난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영화 속 세상이 그렇게 좋은 세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 본 “천공의 성 라퓨타”도 마찬가지다. 그 세상에선 전체주의 정부의 산하로 보이는 강력한 군대가 사람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해적과 같은 무장 세력이 마을을 공격하며, 평화로운 색채와 대비되어 꽤나 잔혹한 장면도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누구나 가지고 있었던 어릴 적의 순수한 마음을 모아 만든 것 같은 등장인물들이 나름의 뛰어난 능력과 용기를 가지고 위기를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면, ‘나도 저런 세상에선 저런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마음이 든다면 사실 그곳이 어디든 살고 싶은 세상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이미 현실을 많이 느껴버린 어른들로 하여금 순수한 마음에 귀 기울이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그 어느 감독보다 훌륭하게 이뤄내는 감독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다.



동굴 속에서 비행석이 빛나는 장면



사실 나도 이렇게 글을 쓰기 전까지는 평점 매기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큰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영화마저도 줄을 세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실이 불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를 글로 남겨보자는 생각을 가진 후부터 나는 그렇게 싫어하던 모습이 되었다. 일단 기준이 없으니 쓸 말도 없어지는 나 자신의 한계도 있었고, 영화를 감상하는 나만의 방법이 평점이라는 시스템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보고나면 꼭 ‘무엇이 아쉬웠는가’부터 생각한다. 이를 테면, 캐릭터의 매력이 조금 부족했다거나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이 약했다거나 개연성이 부족하다거나, 이런 식이다. 변명 겸 서론이 길어졌는데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딱히 아쉬운 점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만약 내가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을 알고 이 영화가 존재하지 않던 때로 돌아가 부족한 측면을 보완해서 내 이름으로 발표할 수 있다고 해도, 내가 과연 무엇을 손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일단 ‘작화’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이니까. 개인적인 취향을 먼저 밝히면 나는 그림 느낌이 나는 그림을 좋아한다. CG 기술이 발달하고 영상 화질이 바로 옆 사람을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한 지금도 아직까지 애니메이션이 사랑받는 이유는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니까’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실사로 만들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오직 애니메이션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나는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미적 가치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 지브리의 작화이다. 지브리의 작화는 독창적이면서 그 어떤 실사로도 대체할 수 없다. 라퓨타의 위용을 드러내는 용의 구름을, 동굴 속에서 빛나던 비행석들의 울림을, 폐허가 된 라퓨타를 아름답게 비추는 햇살의 느낌을 과연 그 어떤 영상으로 바꿔 표현할 수 있을까. 저번에 “모모노케 히메”와 관련된 영상을 찾아보면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작업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엄청 힘들겠다’였다. 실사로 찍으면 하나의 장소에서 몇 번의 컷으로 끝내는 씬이 그곳에선 몇 번이고 고치고 다시 그리고 필름을 바꾸고 화면을 옮겨야 마무리된다. 이렇게 진행되는 작업이기에 사실적이지 않아도 박진감이 느껴지고, 2D의 캐릭터에 감정이 묻어나며,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감동과 슬픔과 기쁨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선 하나, 색 하나도 허투루 쓰인 게 없다.

‘연출’은 따로 말하는 게 우스울 정도다. 작화가 워낙 뛰어나서인지 아니면 연출이 작화를 이끌어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두 요소가 서로 착착 감겨 하나의 시너지를 이루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약간은 정적이면서도 하나하나가 디테일하고, 하나의 화면 속에서 움직여야 할 것은 빠짐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가만히 배경처럼 자리하는 부분들도 그 멈춤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시타와 파츠, 비행석과 비행선



더불어 ‘이야기’로서의 매력에도 흠집이 거의 없다. 영화에서 서사를 이끄는 세력은 크게 세 집단, 시타와 파츠, 도적들, 군대와 무스카이다. 이들은 저마다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데 감독은 이러한 동기들이 하나의 대상, 즉 ‘라퓨타’를 향하도록 훌륭하게 조율했다. 이 작업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목적과 집단이 분리되고 또 합쳐지기 때문이다. 시타는 초반만 해도 라퓨타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파츠와 만나면서 본인의 정체성을 수용하고 라퓨타를 향한 여정에 적극성을 보이게 된다. 반면 파츠는 허황된 망상에 빠졌다는 비판만 받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주장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라퓨타를 찾는 일에 열정을 보인다. 나아가 이 두 아이들은 애정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상호작용해서 결국 본인의 정체성을 향한 각자의 길에서 서로가 상대방의 추진력이 된다. 그 외에도 도적은 라퓨타의 금은보화를, 군대는 라퓨타의 멸망은, 무스카는 라퓨타의 압도적인 힘을 목적으로, 때로는 시타와 파츠의 방해자가 되었다가 때로는 동반자가 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동기를 작업하는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에 이 영화가 군상극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세력들이 등장함에도 그들의 모든 행동뿐만 아니라 전체 서사의 개연성까지 잡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작업이 훌륭한 마무리까지 이어지기 위해선, 최종목표인 라퓨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매우 중요했다. 솔직히 영화를 보는 중에는 여기서 미끄러져 영화의 감상 전체가 망쳐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걱정을 조금 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나의 지나친 망상에 불과했다. 영화는 이것까지도 깔끔하게 수행함으로서 끝내 훌륭한 작품을 완성했다. 라퓨타는 그 등장부터 우주로 사라지는 마무리까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감동, 깊은 여운을 느끼게 함으로서 영화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짧게만 언급하겠다. 대체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영화들과 비슷했고 또 다른 영화들처럼 스토리에 잘 녹아들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 끊임없는 과학 발전의 위험성, 군대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다른 것보다 인트로에서 등장하는, 마치 벽화처럼 표현되는 라퓨타의 흥망성쇠는 짧고 굵게 모든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생각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 5.jpg 라퓨타의 중심부에서 무스카



다만,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떠오르는데, 바로 핵심 빌런인 무스카의 이야기다. 라퓨타를 차지하고 그의 본명이 드러나는 부분이 이야기의 반전으로 기능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 이름 하나로 그의 행동과 왜 그가 핵심 악역인지까지 설명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에서 강력한 임팩트를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충격의 효과를 살짝 걷어보면, '그가 왜 빌런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불명확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설명은 그저 시타와 같은 라퓨타 왕족의 핏줄을 타고났지만 그의 조상은 인류를 지배하는 쪽을, 시타의 조상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식의 간략한 요약에 불과하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확실한 메시지를 심어주는 데 약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라면 또는 현실에 때가 많이 묻어 영화에 깊게 몰입하지 못한 어른들이라면, 라퓨타가 무너지는 장면에서 '아, 아깝다. 저럴 거면 그냥 나한테 주지'라거나 '시타와 파즈가 둘이서 라퓨타에서 사는 결말도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까지 설득할 수 있는 장치를 스토리에 녹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기사나 관련 영상들을 찾아보면, 원래 미야자키 하야오는 무스카의 야망과 몰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썼지만 지브리의 내부 회의 과정에서 이것이 대폭 수정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어찌 보면 충분히 예견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이야기에서 교훈보다 즐거움을, 진부한 도덕보다 소재와 이미지의 신선함을 더 중시하는 편이기에 이러한 점이 큰 결함으로까지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해야겠다. ‘음악’은 역대 최고다.




평점 : 4 / 5


*****기준******

1 : (망작) 이걸 본 시간이 아깝다.

1.5 : 봤던 거 한 번 더 볼껄.

2 : 장점보단 단점이 많네.

2.5 : 단점 하나가 너무 크다.

3 : (평작) 뭐, 장단점 크기는 비슷하다.

3.5 : 장점 하나가 압도적이다.

4 : (수작) 단점이 거의 없다.

4.5 : 내 이름을 걸고 추천할 수 있다.

5 : (명작) 죽기 전에 하나만 더 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