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간만에 피가 차가워지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피에 거품이 잔뜩 낀 느낌이다. 원작이 있는 영화라고 하니 그걸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글쎄, 잘 모르겠다.
일단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한 번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간단하게 말하면, 냉전시기 영국 정보국에 잠입한 이중 첩자, 통칭 두더지를 잡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조지 스마일리라는 인물로, 컨트롤이라는 영국 정보국장의 오른팔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컨트롤이 부다페스트 작전을 크게 실패하고 정치권의 압박을 받자 본인도 함께 퇴출된다. 부다페스트 작전이란 헝가리의 장군으로부터 영국 정보국 내부의 두더지에 대한 정보를 받아오는 작전이었는데, 컨트롤이 파견한 짐이라는 요원이 장군과 접선하여 정보를 얻기도 전에 이를 먼저 알아차린 두더지와 소련에 의해서 오히려 피살당하게 된다. 이렇게 두더지에 대한 관심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나 싶던 찰나, 정보국의 배신자로 낙인 찍혀있던 리키가 재무부 장관에게 직접 연락하여 두더지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두더지가 영국 정보국의 수뇌부들 중 한 명이라는 점에서, 영국 정부도 이를 더 이상 괄시할 수 없게 되었고 은퇴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뿐만 아니라 주요 용의자로 의심되는 4명의 인물과 함께 오랫동안 일해 온 스마일리에게 이 임무를 맡기게 된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핵심 줄기인데,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이 외의 곁가지들이 엄청 많다. 주요 용의자로 의심되는 4명의 수뇌부는 미국과 영국의 정보 거래를 위한 위치크래프트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소련의 이중간첩으로 의심되는 인물과도 은밀한 거래를 행하고 있었다. 좀 더 거시적으로 소련과 영국의 구도에서 살펴보면, 카롤라라는 소련 쪽 인물이 모든 일을 배후에서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냉전시대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올 수 있는 정치 상황, 인물, 공작 등은 다 나오고 있으니 이걸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봐야하는 관객들의 머리는 터져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작인 동명의 소설은 매체의 특성상 정보나 이야기의 속도를 독자의 몫으로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디테일한 묘사를 담으면서도 흐름만 조율하면 큰 서사를 다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철저히 감독이 관객에게 2시간이라는 한정적인 시간동안 모든 정보를 떠먹여줘야 한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풀어야했던 감독의 머리도 매우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못 만든 영화의 면죄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단 이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정보의 생략”에 있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 원작의 핵심적인 이야기를 완전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부가적인 인물들과 사건을 제거하면서도 기본적인 틀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각색이 그 작업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것은 영미권이 아닌 사람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한국 관객 입장에서 (물론 영미권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생각해보면, 등장인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첩보 과정에서 사용되는 은어나 용어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해하기가 어렵다.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모든 인물과 얼굴을 매치시키는 작업도 익숙하지 않으며 영화 자체에서도 이러한 정보를 친절하게 읊어주지 않는다. 대체로 씬의 전환이 인물의 마지막 대사에서 그것을 표현한 화면으로 연결되었는데, 이러한 방법은 방대한 분량의 정보를 압축적이면서도 세련되게 표현하는 것에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번역된 자막과 눈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의 얼굴으로만 파악해야 하는 관객들에게는 그리 복잡하지 않은 정보들까지도 머릿속에 담아내기 힘든 방식이었다. 또한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이름의 구성이 우리나라처럼 성과 이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해도 형태 자체가 익숙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같은 인물이 때로는 성으로 불리고 때로는 이름으로 자막에 나오는 경우가 만았다. 때문에 대사로 전달되는 정보를 나중에야 ‘실은 이 사람에 대한 것이었구나’라며 깨닫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생략의 한계는 인물들의 정보 자체의 생략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수뇌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들인지, 어떤 과정에서 그러한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며, 사건 진행되는 과정 중 그들의 행방은 또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결말을 보다 감정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빌과 짐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욱 디테일하게 알 필요가 있다. 원작에서 둘은 친구 또는 그 이상의 동성애까지 암시될 사이였고, 짐은 부다페스트로 가기 전 아무에게도 이 작전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컨트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빌에게 들려 본인이 맡은 임무에 대해 귀띔해주었다. 사실 짐은 이미 빌이 두더지라는 사실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빌을 믿었고 또 그가 진심으로 영국에 귀화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가로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총을 맞아야만 했고 러시아로 끌려가 고문을 당해야 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그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어떤 심경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을 팔아넘긴 연인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처지에 대한 비관은 한 데 섞여 그의 마음을 마구 흔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끝에서 나온 장면이 바로 짐이 빌에게 총을 쏘고 빌은 눈물 같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를 영화에선, 짐이 총을 맞았다는 소식을 엿들은 빌이 허겁지겁 영국정보국으로 달려가는 모습, 빌이 컨테이너 숙소에서 고뇌에 빠진 모습 정도로만 묘사할 뿐이다. 그러니 원작을 보지 못한 관객들이라면 어떻게 그들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여기서 갑자기 쟤는 왜 쟤한테 총을 쏘는 거지?“라며 의아해한 관객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인물의 정보는 단순히 서사의 이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물에 대한 정보 나아가 이를 통한 이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영화 속에 빠져들고 계속해서 몰입을 유지하며 영화 속 인물에게 완전히 본인의 감정을 대입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영화조차 그저 눈앞에 지나가는 영상물 하나에 불과할 뿐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감정의 매개체가 되지 못한다. 물론 원작은 이보다 훨씬 장대한 군상극에 가깝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담는 것이 애초에 힘들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보다 실력 있는 감독이었다면 원작을 모두 읽은 관객뿐만 아니라 아예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며, 센스 있는 제작자였다면 이 이야기는 평범한 2시간짜리 단편 영화로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드라마나 시리즈물로 제작하여 하나하나 섬세하게 짚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마음이 커서 좀 세게 얘기한 것도 있는데, 사실 또 그렇게까지 나쁜 영화는 아니다. 가끔 나오긴 했지만 에스피오나지 장르 특유의 긴장감 있는 연출도 좋았고, 냉전 속 영국 입장에서 속내를 알기 힘들었던 소련을 카를로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한 것도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배우들의 ‘연기력’이었다. 나는 사실 게리 올드먼이라는 배우를 많이 보지 못했다. 배트맨 시리즈의 고든 정도가 기억의 전부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과연 이 배우 말고 다른 누가 캐스팅 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연기는 완벽했다. 특유의 카리스마나 목소리는 상대 배우뿐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압도시켰고 단 한 순간도 약해보이지 않았다. 이외의 콜린 퍼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거의 영국 남자 배우 올스타전에 가까운 캐스팅도 있으니 이렇게 유명한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아깝지는 않을거라 생각한다.
평점 : 2.5 / 5
*****기준******
1 : (망작) 이걸 본 시간이 아깝다.
1.5 : 봤던 거 한 번 더 볼껄.
2 : 장점보단 단점이 많네.
2.5 : 단점 하나가 너무 크다.
3 : (평작) 뭐, 장단점 크기는 비슷하다.
3.5 : 장점 하나가 압도적이다.
4 : (수작) 단점이 거의 없다.
4.5 : 내 이름을 걸고 추천할 수 있다.
5 : (명작) 죽기 전에 하나만 더 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