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40대 여성의 수험일기 #4

장기기억과 흑역사

by 철없는 영

참으로 생뚱맞은 일이었다.


'그 여자'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닦아내도 시야가 부옇도록 자꾸 그렁그렁 차오르는 눈물.. 그리고 급기야는 펜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는 그 여자 때문인지 수험 스트레스 때문인지 모를 무언가 때문에 한참을 목놓아 울어버렸다.


법과목의 논리 정연함으로 바삐 움직이던 긴장된 뇌의 어느 부분을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 온 그 기억 속 여자는 내가 아직 미취학아동이던 시절의 '엄마'였다.


40대 중반을 향해가는 지금의 나보다 무려 10살 정도는 더 어렸던 그 시절의 엄마는 극복할 수 없는 가난과, 무능한 남편과, 내리사랑이라도 가끔은 버거웠을 세 명의 자녀를 둔 여자였다. 어릴 적 부모에게 버려졌고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한..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주욱 끌고 해보지 않은 부업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해야 했던 가여운 여자.


참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수험을 시작한 후로 종종 이런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최근의 기억이 아닌,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들, 수험 이전 바쁘게 살아가던 평범한 일상에선 꺼낼 일조차 없던, 내 기억 어딘가의 보존서고 같은 곳의 이야기들..


수험카페를 보면 가끔 이런 문제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불만족스러웠던 인간관계, 하지 않았어야 할 말과 행동으로 얼룩진 흑역사 등..


"학습한 내용이 장기기억으로 저장되려고 지금 장기기억을 점유하고 있는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그런 현상이 생긴다"는 등의 친절한 댓글들이 달렸고 어쨌거나 학습한 내용이 장기기억으로 이동하려는 과정 중의 잡음이라니 살짝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 후로도 원치 않는 보존서고 기억 불러오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80년대 후반 초등학교 1학년 교실, 숙제를 하지 않은 아이들은 겁에 잔뜩 질려 교탁 앞에 일렬로 서있다. 40대 후반정도 되어 보이는 여교사는 신경질이 가득한 얼굴을 찌푸리고 체벌을 시작한다. 학급 부반장이던 가난한 여자아이의 차례가 되자 교사는 사정없이 아이의 뺨을 후려쳤고 아이는 그저 어안이 벙벙하여 울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있다.


버리고 싶은, 하필이면 왜 그런 상처들이 내 장기기억에 한가득일까.. 같이 숙제를 하지 않았지만 뺨은 고사하고 손바닥 한 대도 맞지 않은 부유한 슈퍼집 아들, 반장의 이름과 그 교사의 이름까지 여전히 너무도 생생한 아픈 기억들.. 소중한 내 학습 기록물들이 굳이 그 기억들을 스쳐 장기기억으로 간다면 받아들여야겠지.. 그렇지만 그 아픔에 다시 빠져들지 말고 도리어 보란 듯 밟고 일어서는 동력으로 삼아보려 한다. 난 이 이야기의 끝이 정말 우울하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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