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40대 여성의 수험일기 #5

다시 시작..

by 철없는 영

답답한 마음을 비우러 길을 떠나는데 돌아오는 길 발걸음의 무게는 왜 늘 같은 것인지..

반려견과 함께 미루고 미뤄둔 여행을 다녀왔다.

30대까지만 해도 혼자서도 한 달 해외여행쯤은 거뜬히 다녀오곤 했는데, 나이를 먹은 탓인지 그렇게 홀로 떠나는 여행이 어느 순간부턴 꺼려지기 시작했다. 젊은 날의 고독은 패션으로라도 일부러 즐기곤 했지만 중년의 고독은 어쩐지 아픔이 한 스푼씩 더 첨가되는 느낌이랄까..


사실 당일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밀려오는 무력감에 랜트해 둔 차량을 취소하려 예약어플을 뒤적였으나 이미 부과된 취소 수수료와 점점 고립되어 가는 스스로에 대한 막연한 걱정과 불안함에 꾸역꾸역 옷을 주워 입고 길을 나섰다. 1년간의 긴 수험이 끝났다고 함께 밥이라도 먹자는 지인들과의 약속을 벌써 세 번이나 에둘러 거절한 것이었다. 그들이 싫은 건 아닌데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약속장소에 나가기까지 대중교통에서 견뎌야 하는 소음과 지인 앞에서 보여야 하는 다소 억지스러운 미소와 계속 이어지는 대화의 흐름을 신경 쓰기엔 아직 내 에너지가 회복이 되지 않아 고스란히 피로감으로 다가올 것이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인 듯하다. 사실 나는, 1년 넘게 항우울제를 복용 중이다. 중증은 아니지만.. 맨 정신으론 기분조절과 수면에 영향이 꽤 큰 편이다. 기질적으로, 또 깊은 사색이 습관이 된 사람으로 약간의 우울과 고독은 늘 하나의 정서처럼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논리성이 요구되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이 정서는 수험을 방해하는 나쁜 정서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다시 항우울제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 얘기는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하는 것으로 하고..)


시험이 끝나고 벌써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첫 달은 그간 수고한 나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 죄책감 없이 쉬었으나(사실 시험을 망쳤다는 자책에 맘 편히 여행을 가거나 사람을 만나지 않고 식단과 운동으로 체형과 체력회복에만 집중했다) 두 달째인 10월부턴 어쩐지 그냥 종일 쉬기엔 아무도 주지 않는 눈치를 스스로 보기 시작했다. 막연히 책상에 앉았으나 이전처럼 하루 10시간 이상의 순공시간을 찍기엔 집중력이 끌어올려지지 않았다. 적게는 하루 3시간에서 많게는 7시간까지 유연하게 2차 과목을 고루 조금씩 다시 시작하며 여전히 체형과 체력, 기분회복에 신경을 쏟았다.


시험 직전 6개월간 눈을 뜨고 잠들기까지 책상에만 앉아 보낸 시간 때문인지 러닝을 시작하고 이틀 만에 무릎관절에 물이 차 염증주사를 맞아야 했고 50m도 못 가 멈춰 서기를 반복할 만큼 체력은 바닥이었다. 나름 보상이라고 신경 쓰지 않고 마구 먹었던 식습관 때문에 여기저기 투덕투덕 붙은 군살 때문에 이젠 100m 밖에서 체형만 봐도 영락없는 후덕한 중년여성의 모습이었다. 시험이 끝난 그다음 날부터 시작한 러닝과 식단관리로 체형을 다시 살리고 체력도 다시 끌어올리긴 했으나 여전히 공부를 위한 집중력은 회복하질 못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무한정의 자유와 결별을 선언하는 어떤 의식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그 연장선에서 반려견과 딱히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은 드라이브를 나선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강화도를 거쳐 북쪽과 가까운 민통선마을 교동도까지 조수석 케이지 속에 느긋하게 누워 나른하게 나를 바라보는 반려견을 태우고 좋아하는 발라드곡으로 채워진 노래들을 들으며 달리는 한적한 시골길.. 그 자체가 조금의 위안이 된 것 같다. 자유와의 결별을 선언한 의미의 여행이지만 내가 세상을 향해 다시 용기를 내 한발 내딛기로 한 신호탄이 된 또 다른 의미로의 여행..


확실히 이제 다시 시작할 시기가 왔다.


쑥과 마늘을 팽계치고 동굴을 뛰쳐나온 호랑이 같았던 나 자신을 늘 혐오하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각오와 노무사가 되고 싶은 충분한 이유와 막연하지만은 않은 가능성 있는 목표..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제자리로 돌아올 이유가 충분하겠지..


딱 1년만 전업수험에 도전하자 했던 과거의 약속과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으로 지금의 나는 어쩌면 내 생의 마지막 직장이 될지 모르는 일터를 찾고 있지만 다시 한번 제대로 내년의 유예기회를 붙들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