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영이의 영화 파먹기
영화를 보는 내내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대체 그녀가 왜 그럴까? 그녀가 이러는 이유가 곧 전개되겠지..
그 질문에 답을 기다리던 내 눈에 서둘러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가 보인다.
신혼 첫날 남편에게 과감히 섹스리스 부부가 될 것을 요구하는 플로렌스..
정 힘들면 다른 여자와 자도 괜찮다는 이상하리만치 비밀이 많은 여주인공..
그렇게 그 둘은 결혼 6시간 만에 헤어지기로 한다.
직접적이진 않지만 언뜻 과거 화면들은 여주인공 플로렌스가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해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혐오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주인공 에드워드와 사랑을 넘어 결혼까지 감행한 것은 어쩌면 그녀에겐 큰 도전이었을지 모르겠다. 화면에 등장하진 않았지만 혐오의 대상이었던 남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의 길로 가는 동안 수많은 고민들에 휩싸였을 그녀. 그때마다 플로렌스를 단단히 잡아준 것은 에드워드와의 따뜻하고 순수한, 인간적인 사랑이었을 것이다. 고비마다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용기를 얻었고 그와 함께라면 그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모든 걸 일찍 포기해 버리기엔 그들의 만남은 너무도 극적이고 강렬했다.
그녀의 세상으로 급작스럽게 날아든 에드워드..
그 둘은 첫눈에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영화는 그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헤어지던 날을 기점으로 그들이 결혼하기까지의 과정, 헤어진 이후 노인의 모습으로 잠시 다시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자연스레 넘나들며 전개된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육체적 관계에 서툰 둘의 모습은 여러 번 관객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그래서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모습.. 누가 봐도 둘은 서로를 부족함 없이 사랑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어머니 슬하에서 늘 외로웠던 에드워드를 플로렌스는 따뜻하게 안아주었고, 속물적이고 강압적인 부모 슬하에서 자란 플로렌스는 감성적이고 섬세한 에드워드가 좋았다.
그렇게 둘은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갔다.
이 지점에서 영화 <체실 비치에서> 영상미 얘기를 한 번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스토리는 맘에 들지 않았지만 미스티하고 따뜻한 색감이 안정적인 화면의 영상미는 정말 아름다웠다. 배경 자체가 아름다운 풍경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지만 그 풍경들을 담아내는 영상도 매력적이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카메라를 그리워하는 감성의 충족 같은 거?
에드워드에게 함께 할 미래를 얘기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던 플로렌스는 결혼을 앞두고 점차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결혼 후 처음 육체적 관계를 원하는 에드워드에게 "사실은 겁이 난다"라고 이야기하고 급기야는 그 관계를 뺀 부부생활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말할 듯 말 듯 갈팡질팡하는 플로렌스.. 그러나 그 둘은 그렇게 각자의 세계로 돌아갔고 노인이 되어 잠시 스친 눈인사를 나눈다. 젊은 그녀가 말하던 명예로운 음악가가 되어, 그때 객석 중앙에 앉아 그녀를 응원하겠다 약속한 에드워드는 노인의 모습이 되어 그렇게 둘의 짧은 재회가 지나간다.
일생 내내 그녀를 그리워한 에드워드를 두고 플로렌스는 오랫동안 음악을 함께 한 첼리스트와 결혼을 하고 세 자녀를 둔다. 이것이 극장에서 나의 빡침 포인트였다.
대체 왜? 에드워드랑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다른 남자는 대체 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대체 왜..
몇 시간을 고민한 결과는 이렇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상처를 함께 안아야 한다는 것..
그것을 생각하니 조금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
플로렌스는 에드워드를 사랑하며 그의 상처를 함께 안았다. 보통 여자라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에드워드의 어머니를 껴안고 그 집의 웃음을 되찾아 줬다. 정신이 아픈 어머니의 오랜 부재로 엉망이 된 집안에 들어가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다시 찾아준 플로렌스였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플로렌스의 아픔을 끝내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강압이 입밖에 내기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플로렌스 역시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지만 사랑을 하는 동안, 하나가 되어 가는 동안 그녀를 깊이 알 시간과 기회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친구로서 오랫동안 그녀 곁을 지켜온 첼리스트는 그녀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가 마음을 스스로 조금씩 여는 동안 차분히 기다릴 수 있었고,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지 않았을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런 일들은 현실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현실이라 가정하면 이런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이 영화 <체실 비치에서>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동일한 제목으로 영국의 작가 이언 매큐언이 2007년 발행한 중편소설이다.
솔직히 소설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영화에서 안타까웠던 스토리 전개가 왠지 소설에선 섬세하게 다뤄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을 전하기엔 눈에 보이는 화면의 표정보다 글이 갖게 하는 상상력의 힘이 월등히 크다고 느낄 때가 많다.
플로렌스를 이해하기 위한 고민의 시간을 거쳐 쥐어짜 낸 이야기는 이렇다.
그러나 처음부터 언급했지만, 이런 생각정리들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막을 내리는 결말은 참 당황스러웠다.
난해한 영화를 보며 의미 부여하길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도 좋을 영화.
전시회 그림 감상하는 느낌으로 보는 분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그러나 원인과 결과가 분명히 드러나는, 특히 반전 같은 거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비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