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영이의 책 파먹기
물건을 잡을 수도, 두 발로 일어설 수도 없는 길고 징그러운 다리들의 감촉이 느껴진다면..
프란츠 카프카 소설 <변신>은 주인공 그레고르의 이런 기이한 아침에서 시작한다.
아버지의 빚과 가족 전체의 생계비를 홀로 짊어지던 그는 벌레가 된 몸을 하고서도 그 아침 출근을 위한 기차를 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풍뎅이 모양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출근하려고 발버둥 치는 그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벌레가 된 자신을 인식하고도 돈을 벌러 나갈 생각이 어떻게 뇌를 지배하는지.. 가엽고 안쓰러운 그레고르..
그의 존재는 현실에서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일벌레'에 불과하다는 걸 소설은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변신한 그레고르는 가족들에게서 분리되기 시작한다.
인간이었던 그레고르는 말 그대로 그 집의 기둥이었다. 그의 존재가 무너지면 가족의 삶도 곧 주저앉고 마는 대들보 같은 존재..
하지만 벌레로 변한 그는 온 가족의 치부이자 짐덩이로 전락하고 만다.
가족들은 행여 그가 타인의 눈에 띌까 전전긍긍했고, 대놓고 그에게 경멸 어린 시선과 언행을 던졌다. 급기야는 더 이상 인간으로 기능할 수 없는 그가 죽기를 바란다.
가족들의 염원대로 그는 벌레로 변신한 껍데기 안에서 처절하고 외롭게 죽어간다.
그들은 여전히 인간의 삶을 살고 희망을 얘기한다.
그런 결말이 가슴 시리게 불편하고 거슬렸던 소설 <변신>
인간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극을 달리는 설정.
이 소설은 '그래도 최소한 가족만큼은'이란 통념을 보란 듯이 부숴버렸다.
그래서 더 차갑고 냉정하게 현실을 보게 한 소설이 아니었을까..
어느 날 몸이 벌레로 변한 설정은 비현실적이지만 인간의 가치를 경제력에 따라 차등 지우는 전개엔 함구하게 된다. 현실 속 우리 모습 역시 이보다 덜하진 않을 것 같다는 슬프도록 처참한 인정..
어떤 참신한 새로움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때 '변신'이란 단어를 보통 사용한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처참한 죽음이 예견된 벌레 인간에게 굳이 '변신'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책의 후반부에 딸려 있는 역자의 평은 이렇다.
"인간에게 비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폭압적 현실 자체가 변신의 원인이다" 또한 "벌레라는 새로운 몸을 얻게 됨으로써 현실의 파괴적 영향으로부터 고유한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
즉, 벌레로의 변신은 인간이지만 돈 버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 더 이상 인간으로 기능하지 않는 동물적 모습을 극단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오히려 그런 동물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으로 회복되고자 하는 주인공의 희망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일을 하기 위해 가족들과 늘 떨어져 출장지의 어느 싸구려 호텔에서 가족들의 온기를 그리워하던 소설 묘사 부분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런 희생의 대가는 차가운 멸시와 처참한 죽음..
불편한 마음에 <변신>이 아닌, <병신>이 제목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잠시 스쳤다.
사람이 더 이상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요즘.
길거리에 나가 수많은 인파 속에 있다 보면 이러한 생각은 점차 더욱 강렬해진다.
단지 나의 일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들,
감정도 공감도 더는 나눌 수 없는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삶에 묶인 마리오네트 인형,
웬만한 자극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맷집이 두터워진 슬픈 존재들..
극으로 치달은 자본주의 안에서 우리는 인간으로 살고 있을까?
실상 우리 모두는 그레고르와 같은 벌레 인간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