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일하는 조직은 보통 셋 중 하나다. 에이전시, 인하우스 그리고 스타트업. 이번 글에서는 디자이너가 일하는 조직에 따른 장단점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스스로가 어떤 조직에서 일할 때 가장 빛이 날지 생각해 보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나는 에이전시에서 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인하우스에서 디자인을 하고 있다. 스타트업은 종종 이직 제안을 받기는 하지만 근무 경험은 없다. 스타트업은 지인들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가고자 한다. 미리 알려 두지만 내 경험이 모든 경험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같은 유형의 조직이라도 조건과 환경에 따라 차이가 크다.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니 감안해서 이해해 주길 바란다. 다만 나와 비슷한 환경에 있다면 공감하고 도움이 될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인과 맞는 문화에서 일하길
내가 디자인을 시작한 곳은 디지털 디자인 에이전시다. 아이디오와 팬타그램 같이 클라이언트를 위해 디자인 컨설팅을 해주는 회사를 디자인 에이전시라 한다. 나는 전 직원 열 명 정도의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일을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이백 명가량의 에이전시에서 경험을 마무리했다. 처음 시작한 곳은 대형 에이전시와 컨소시엄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소규모 회사였다. 마땅한 사수도 없었고 모든 일을 거의 혼자 맡아 처리해야 했다. 클라이언트와의 미팅, 시안제작 그리고 프레젠테이션까지 주니어인 내가 짊어졌다.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프로세스를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 홀로 시행착오를 겪었고, 사수가 없으니 완성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안 제작에 들어갔으나 끝내 디자인 퀄리티가 나오지 않아 프로젝트가 무산된 일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대형 에이전시와 컨소시엄으로 진행하는 일이 많아 꽤 알만한 브랜드 프로젝트가 포트폴리오로 쌓이기 시작했다. 그 경력으로 큰 규모의 에이전시로 이직을 했는데 다시 주니어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경력에 비해 당시 실력이 시니어 디자이너에는 미치지 못하는 사실을 나도 인정했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다. 면접 때 “입사하면 주니어 포지션으로 일할 텐데 괜찮으세요?”라는 질문에 다시 배울 각오로 입사하겠다는 답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역시 규모가 커서 인지 기획, 개발, 디자인 조직이 매우 세밀하게 나뉘어 있었다. 내가 들어간 조직은 제안·구축 조직이었다. 당시 대형 에이전시는 크게 제안·구축 그리고 운영 조직으로 이뤄져 있었다. 제안·구축 조직은 클라이언트 제안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구축까지 진행한다. 그 뒤 브랜드와 디지털 채널 운영 계약이 따로 있으면 운영 조직이 이어받아 연간 운영을 대행한다.
업무 강도는 제안·구축 조직이 높은 편이었다. 제안 시안을 작업할 때면 야근, 철야, 주말출근이 당연했다. 반면운영 조직은 퇴근 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분위기였다.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에 추구하는 목표도 달랐다. 당시 제안·구축 조직은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운영 조직은 서비스 운영의 안정화 추구를 목표로 운영됐다. 제안·구축 조직에서 나는 많이 성장했다. 주니어로 입사해 디자인팀 리더로 마무리를 했으니 내 디자인 역량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준 곳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에이전시에 입사한다면 제안·구축 조직으로 들어가길 추천한다. 그래야 경험이 쌓이고 그 과정에서 크리에이티브를 키울 수 있다. 제안·구축은 매번 성격이 다른 브랜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때문에 역량이 성장할 수밖에 없다. 또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수주를 하다 보니 디자인 완성도 중심으로 모든 일이 진행된다. 경력이 적더라도 디자인 아이디어와 완성도가 좋으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한마디로 능력 중심으로 대우한다.
단점은 업무 강도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회사가 성장하는 구조라 그만큼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치열하게 준비한다. 다양한 경험의 장점은 있지만 에이전시 역할은 단기에 머물고 휘발성일 때가 많다. 제안·구축이 끝나면 더 이상 서비스에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꾸준히 서비스를 운영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은 경험이 불가능하다.
인하우스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자체 디자인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네이버와 카카오 내부 디자인 조직을 생각하면 된다. 서비스 개발, 운영을 내부 디자인 조직에서 자체 해결한다. 에이전시처럼 다양한 브랜드의 서비스를 경험하진 못하지만 자사의 서비스를 깊이 있게 운영하면 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
UX 관점으로 디자인하기를 원하는 디자이너에게 맞는 곳이다. 그렇다고 에이전시가 UX 관점으로 디자인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에이전시는 개발이 끝나면 보통 서비스 운영에 개입하지 않거나 정해진범위 안에서만 역할을 맡기 때문에 초반 UX 컨설팅의 성향이 더 강하다. 하지만 인하우스는 오랫동안 자사 서비스를 운영하기에 사용자 반응을 보며 UX 관점의 점진적 개발과 개선이 가능하다.
조직에 따라 다르겠지만 UX 분석, 설계, 디자인 조직이 구축되어 있는 환경에서는 좀 더 UX 중심으로 디자인할 수 있으니 조직구조를 잘 살펴보고 결정하길 권한다. 데이터에 대한 분석과 공유가 활발한 곳에서는 데이터를 근거로 디자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비스 가입 화면에서 사용자 이탈이 많다는 데이터를 수집했다면 가입 화면 디자인을 개선할 근거로 삼을 수 있다. 개선방법은 A/B 테스트를 통해 데이터를 찾을 수 있다.
A/B 테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구글 데이터 과학자였던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가 쓴《모두 거짓말을 한다》를 읽어 보길 추천한다. 저자인 세스는 구글의 디자인은 철저하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고 말한다. A/B 테스트를 통해 버튼 컬러도 결정한다. 동일한 환경에서 A그룹에게는 파란색 버튼을 B그룹에게는 초록색 버튼을 노출하여 클릭률을 비교한다. 하지만 데이터도 완벽하지 않다. 결과론적 해석은 가능해도 인과성을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A/B 테스트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A/B 테스트를 통해 사용자의 사전 선호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하우스만의 큰 장점이다.
인하우스는 에이전시보다는 조직 규모가 크거나 세분화된 곳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진행할 때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흔히 말하는 사내 정치가 심한 곳도 있다. 정치를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치가 우선하는 곳에서 일하려면 디자이너로서 매우 곤욕스럽다. 반대로 에이전시는 사내 정치가 적은 편이다. 디자인을 팔아야 매출이 올라가는 구조라 디자인을 잘하는 디자이너가 인정받는다. 반대로 인하우스에서는 디자인만 잘한다고 인정받지는 않는다. 인하우스는 정치, 디자인, 협업 조직과의 관계, 신경 쓸 부분이 많다.
종종 스타트업에서 이직 제안을 받는다. 제안이 들어오는 경로는 다양하다. 포트폴리오를 우연히 보고 요청하기도 하고 내가 쓰는 디자인 관련 글을 보고 요청하기도 한다. 최근에 받은 제안은 비즈니스 네트워크 SNS 플랫폼인 링크드인을 보고 들어온 듯싶었다. 종종 제안을 받는 일이 있어 나는 스타트업에 대한 정보를 지인들을 통해 수집했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나는 스타트업을 크게 초기, 중기 그리고 말기로 구분한다. 초기 스타트업은 말 그대로 신생을 말한다. 10~20명 정도 인원으로 운영하고 보통조직에서 말하는 사수 같은 존재가 없어 대부분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회사에 로고가 필요하면 로고를 만들고 서비스 UI가 필요하면 UI디자인을 한다. 명함이 필요하다면 그것도 디자인한다. 스타트업 초기에는 스페셜리스트보다는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하다. 주니어 디자이너가 스타트업 초기 회사에 들어간다면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주니어는 롤모델이 필요하다. 디자인 개념을 잡아 주고 끌어줄 사수가 필요한데 스타트업에서는 쉽지 않다.
한 번은 스타트업에 있는 지인을 통해 이직 제안을 받은 적 이 있었다. 페이스북이 차세대 비즈니스로 VR을 점찍으며 VR이 한창 이슈의 중심에 있었다. 그즈음 에이전시 생활을 할 때 같이 일했던 부사수에게 연락을 받았다. 스타트업에 입사했는데 시니어디자이너가 곧 퇴사를 한다며 혹시 그 자리로 와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혼자서는 디자인을 끌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당황스러우면서도 그 스타트업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정확하게 뭐 하는 곳인지 물었다. VR 콘텐츠를 만드는 스타트업이고 꽤 재무가 튼튼하고 안전한 곳에서 투자도 받고 있다고 했다. 투자자 중에는 유명 영화배우도 있었다. 실제 그 배우가 사무실에 와서 VR 콘텐츠를 경험하고 극찬하고 갔다고 말했다.
대부분 스타트업에 입사할 때는 그 회사의 서비스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알고 있는가? 스타트업 열 개 중 여덟아홉은 이삼 년 안에 문을 닫는다는 사실. 초기 스타트업에서 기여도를 인정받으면 스톡옵션으로 지분을 받는다. 회사가 대기업에 인수되든가 상장하면 큰 보상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그렇게 보상을 받고 은퇴한 사람도 만나 봤다. 하지만 그 확률은 채 10퍼센트가 되지 않는다. 나는 모험심이 그리 높은 사람이 아니다. 투자를 해도 원금 손실이 있는 곳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물론 그 10퍼센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디자이너의 노력과 역량만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당시 나는 VR 콘텐츠 비즈니스에 확신이 서지 않아 제안을 고사했다. 후배는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직했다. 초기 스타트업에 합류할 때는 많은 부분을 고려하고 확인해야 한다.
스타트업이 중기로 넘어가면 어느 정도 시장에서 비즈니스 모델을 인정받아 투자금이 넉넉한 시기다. 이때는 주로 인재를 끌어들이고 스타트업 특유의 문화를 구축하는 비용으로 투자금을 사용한다. 좋은 조건으로 대기업 출신 디자이너와 실리콘밸리 경험이 있는 디자이너 등을 끌어모으기 시작하는데 이때는 서비스 고도화를 위해 스페셜리스트가 많이 필요하다. 이 시기부터 어느 정도 디자인 조직의 체계와 문화가 갖춰진다. 대외적으로 디자인 콘퍼런스를 진행하기도 하고 다른 조직과 차별화된 일하는 문화를 적극 홍보해 더 많은 인재를 끌어모으려 한다. 주니어가 이 시기에 입사한다면 많은 경험을 하고 성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스타트업 말기는 비즈니스 모델로 수익이 발생하는 시기다. 상장을 하거나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며 이때부터는 스타트업의 꼬리표가 떨어진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말기까지 살아남은 스타트업은 채 10퍼센트가 되지 않는다. 요즘 디자이너들이 스타트업에서 주도적으로, 자유로운 문화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주도적이고 자유로운 문화에는 더 강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늘지 않는 디자인 중에서...]
참고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