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시안 리뷰가 있는 어느 회의실. 디자이너가 만든 시안이 화면에 띄워진다.
깔끔하고, 세련되고, 보기에도 좋아 보인다. 그런데 누군가 묻는다.
“이 구도는 왜 이렇게 했어요?”
“색은 왜 이걸로 정했죠?”
디자이너는 잠시 머뭇거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게 더 예뻐 보여서요.”
순간, 공기는 어색해진다.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디자이너
시각적 언어의 한계와 언어화의 필요성
비언어적 감각 훈련의 결과
디자인 교육과 실무는 대체로 시각적 판단, 감각, 직관에 집중된다. 오랜 시간 시각적 언어로 사고하고 표현해 온 디자이너는 자연스럽게 비언어적 감각에 익숙해진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그리며, 머릿속 이미지로 판단하는 이들은 ‘왜 그렇게 느꼈는가’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훈련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감각을 말로 풀어내는 훈련은 거의 받지 않았다. 결국 좋은 시안을 만들고도, 왜 좋은지 말하지 못하는 디자이너가 된다.
디자인의 언어는 ‘내부용’이다
디자이너는 말한다.
“정보의 위계가 명확하고, 시선의 흐름이 자연스러워요.” 하지만 기획자나 클라이언트는 이런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디자인 용어는 마치 전문가들끼리만 통하는 은어처럼 느껴지기 쉽다. 디자인에는 나름의 언어가 존재한다. 배치, 계층 구조, 리듬, 시선 유도, 색채 조화 등은 모두 디자인 설계 논리의 일부다. 하지만 이 언어는 내부자만 이해하는 ‘은어’에 가깝다. 일반적인 언어로 번역하지 않으면, 디자이너 외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벽이 생긴다. 이걸 일반어로 번역해 말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설명은 감정을 깬다고 믿는 문화
디자인은 감각이고, 감정이다. 그래서 어떤 디자이너는 설명하는 걸 싫어한다. "그냥 느끼면 안 돼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디자인은 ‘느낌’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또 설명되지 않는 감각은 신뢰받기 어렵다. 나는 예전 클라이언트를 대상으로 하는 디자인 시안 리뷰에서 '느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비용을 지불하고 의뢰한 디자인에 대한 근거와 논리가 개인의 '느낌'이라면 클라이언트는 속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시안 리뷰 시 '느낌'은 금기 단어였다.
디자이너의 고질병인 예술적 신념, 즉 "그냥 보면 안 돼요? 왜 설명해야 하죠?"라는 태도는, 오히려 디자인을 외부와 단절시키는 요인이 된다.
설명은 협업의 시작이다
디자인은 혼자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개발자, 기획자, 마케터, 클라이언트 모두가 함께 만든다. 이럴 때, “왜 이 디자인이어야 하는지”, “이 색이 브랜드와 어떤 연결이 있는지”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설득이 되고, 신뢰가 생기고, 협업이 굴러간다.
논리가 있어야 피드백을 버틴다
“여기 좀 밋밋한데요?”
“이 폰트 너무 평범하지 않아요?”
누군가 이렇게 말했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면 오히려 불리하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차분하게 말할 수 있다면?
사용한 폰트가 브랜드 톤과 어떤 연관성이 있고 폰트의 조형적 형태의 의미가 브랜드와 시각적으로 어떤 상호 작용을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면, 그리고 그 설명에 근거와 다수가 공감할만한 스토리가 있다면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소모적인 피드백을 차단할 수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어떻게 시각화했는지에 대한 언어가 필요하다. 감각이 논리로 무장될 때, 피드백은 논쟁이 아니라 대화가 된다.
말할 수 있어야 전략이 된다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게 꾸미는 게 아니다. 방향을 제시하고, 브랜드의 얼굴을 만들고, 사용자의 행동을 유도하는 전략의 핵심이다. 그 전략이 되려면, 디자이너는 ‘왜’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시안도, 말하지 못하면 설득되지 않는다. 감각을 설명하는 능력, 그게 지금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새로운 언어다.
"보면 알아요"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시안은 시각적 완성물일 뿐, 그 배후에는 수많은 판단과 선택이 숨어 있다. 디자인은 결국 ‘보여주는’ 일이지만, 보여주기만 하면 안 된다. 왜 이렇게 보여주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시안을 언어화하는 순간, 디자이너는 감각만 따르는 괴짜 예술가에서 팀을 움직이는 설계자, 전략가로 바뀐다.
‘말할 줄 아는 디자이너’, '시안을 언어화할 줄 아는 디자이너' 그게 진짜 실력이다.
디자이너의 말하는 힘을 키우는 3가지 훈련
디자인 노트 쓰기
작업 과정·선택 근거·대안 시나리오를 짧게 기록해 두면, 설명 스크립트가 자동 축적된다.
비디자이너에게 피드백 받기
생소한 청중 앞에서 말해 보면, 전문 용어가 빠지고 핵심만 남는다.
논문·브랜드 가이드 읽기
디자인을 ‘언어화’해 놓은 문서를 관찰하면 표현 틀이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