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에세이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잘난 놈 제치고. 못난 놈 보내고."
"안경잡이같이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였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전형적인 인간의 스토리
약육강식, 적자생존 말만 들어도 치열함과 살벌함이 느껴진다. 그런 치열함과 살벌함을 감수하고 감내하는 것은 성공을 위한 미덕이다. 또 성공한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무용담은 항상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 이어진다. "내가 달건이 생활을 열일곱에 시작했다. 그 나이 때 달건이 시작한 놈들이 백 명이다 치면은.. 지금 나만큼 사는 놈은 나 혼자 뿐이야.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잘난 놈 제치고. 못난 놈 보내고. 안경잡이같이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였다. 고니야? 담배 하나 찔러봐라." 영화 타짜에서 곽철용의 무용담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아주 적절한 예시다. 왜 우리는 이런 치열함과 살벌함의 스토리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까?
예전 회사에서 입사한 지 10년 차가 되면 그것을 기념하는 호칭과 그 호칭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PPT를 보여주곤 했다. 그 PPT에 대한 내용은 초원을 배경으로 사자와 가젤이 등장한다. 사자의 먹이가 되지 않게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가젤은 결국 사자의 먹이가 된다. 대충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초원의 약육강식에서 10년을 버틴 무용담 같은 스토리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시에는 별생각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인간 사회를 짐승의 생태계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왜 짐승의 생태계에 인간 사회를 비유하는가? 우리는 인간이 아니던가? 물론 한 때 인간도 짐승이었다. 수렵채집 시절 강자에게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 열심히 뛰어야 했다. 하지만 밀을 재배 하면서부터 우리는 힘들게 뛰어다니던 수렵채집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하여 사회를 이루고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렇게 짐승의 생태계 속에서 생존했던 우리는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았는가? 물론 인간사회가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우리는 많은 과오를 남겼다. 침략을 통한 식민지 통치와 노예제도와 계급사회, 비인간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들을 자행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과오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가? 이제 짐승의 약육강식 방법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약자를 돌보고 위로하며 응원하지 않는가?
적자생존은 다윈의 자연선택을 당시 보수적이던 영국의 한 사회학자가 적자생존으로 해석하면서 마치 다윈이 주장한 개념으로 오인하게 됐다. 다윈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한 개체가 종을 보전하고 멸종하는 것은 그 종이 속한 자연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예를 들어 갈색의 나비와 초록색의 나비가 있다고 치자. 그럼 초록색 숲 속에서 어떤 색의 나비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클까? 초록색 나비 아니겠는가? 결국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닌, 우연의 이유로 살아남은 것이다.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 비유해서 무용담을 털어놓는 사람들 대부분은 우연한 이유로 성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우연한 이유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관심을 유도할 수가 없다. 그렇게 그 우연한 이유에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무용담을 입히기 시작한다. 대부분 고대 전설과 설화들이 이런 식으로 탄생한다. 사람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생태계를 싫어한다. 수렵채집을 멈추고 정착을 한 것이 그 증거 아니겠는가?
약육강식은 아마도 짐승처럼 남의 것을 빼앗고 약탈하면서 강자가 된 이들의 합리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트업 기업들의 비즈니스 키워드는 공유다. 사회의 긍정적인 효과와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공유다. 나는 사회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 비유하며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별로다. 많이 나누는 사람이 강자가 되는 세상을 꿈꿔본다. 예전부터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어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