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공포영화는 썩 내켜하지 않습니다. 굳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가며 불쾌한 기분을 얻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유일하게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한 공포영화이고 최근에 VOD로 다시보기까지 했던 호러영화입니다. 처음엔 공포영화를 못 보는 사람도 괜찮게 볼 수 있을 것이란 영화 리뷰에 끌렸습니다. 그리고 극찬에 가까운 영화평론가들의 한줄평들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웃음과 공포의 롤러코스터”
“겁나게 재밌는 호러”
“물 만난 고기는 이렇게 논다”
“끝내주게 재미있는 호러”
무서운 영화가 어떻게 웃음을 줄지 궁금했습니다.
호기심에 끌려서 생전 보지 않던 공포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간략하게 줄거리를 살펴보면,
은행에서 일하는 주인공, 크리스틴
어느 날, 자신의 집을 차압당할 상황에 놓인 노파가 나타나 도움을 요청합니다.
크리스틴은 노파를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요청을 거절하게 되고 노파는 굴욕감을 느낍니다.
크리스틴에게 저주를 내리는 노파. 이 저주 때문에 크리스틴에게 악령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한 노파의 저주로 인해 주인공은 비정상적이고 공포스런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악령이 나타나 주인공을 괴롭히고 영혼을 데려가려고 합니다.
노파가 주인공을 기습 공격하고 관객들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장면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리고 각종 분비물들로 비위를 상하게 하는 지저분한 장면들이 수시로 나옵니다. 온갖 불결함의 향연에 반드시 식사시간을 피해서 보길 권해드립니다. 놀람과 지저분함의 콜라보레이션에 하루치 식욕이 달아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영화 자체가 그리 어둡고 무섭지만은 않습니다. 중간중간 나오는 코믹한 장면을 보다 보면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당황스러워집니다.
저주를 받은 주인공이 직장에서 갑자기 코피를 흘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 자체는 충분히 관객들에게 불길함을 안겨주며 공포스런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한걸음 더 나아가 코피가 콸콸 흘러나오다 못해 폭포수처럼 세차게 뿜어내는 장면을 담아냅니다.
이런 기습적인 코피 폭포를 보면 갑자기 기분이 묘해집니다. 웃긴 장면 같은데 지금 웃어도 되는 건가?
정통 공포영화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당황함을 느낄 법합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대놓고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은 아니다 보니 조용히 장면을 감상합니다.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 주인공의 조력자가 이러한 저주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는 영매를 찾아가 볼 것을 권합니다. 그런데 대화가 진지하게 흘러가다가 엉뚱한 길로 빠집니다.
조력자 : 그 여인(영매)은 목숨을 걸고 도와야 하는거라 거저 해주진 않아
주인공 : 뭘 원하죠?
조력자 : 현찰 1만달러, 내일까지.
영화를 보는 사람의 표정도 주인공의 표정처럼 멍해집니다. 왜 여기서 또 웃기려는 건가요.
영매가 저주를 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돈이라고 하니 실소가 나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는 영매가 사는 곳도 결국 자본주의 사회인가 봅니다. 악령과의 영적인 사투가 급작스레 자본주의 사회의 비즈니스 얘기로 넘어온 것 같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영매와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저주를 풀기 위한 의식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악령을 불러내 염소의 몸으로 옮겨놓은 다음, 그 염소를 죽여서 반복되는 저주를 끊겠다는 계획이죠.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만한 장면에서 기어이 감독은 큰 웃음을 터뜨리게 만듭니다. 의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악령이 염소에서 조력자의 몸으로 옮겨붙습니다. 그런데 이 악령이 씌인 조력자, 잠시 주인공을 위협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악령이 나타나 주인공들과 대면하는 결정적인 장면에서 느닷없는 음악과 함께 공중부양 댄스가 펼쳐집니다.
이 장면에 이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지하고 무거운 영화를 기대하고 웃음을 참았던 사람들도 이쯤되면 모든 걸 포기하고 감독의 연출을 즐기게 됩니다.
공포영화
공포/스릴러 영화만큼 높은 몰입감을 가질 수 있는 영화장르도 드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본능적으로 생명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모든 주의를 집중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공의 생명과 안전에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는 내용을 따라 가다보면 관객들은 강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내용에 수반되는 불쾌감을 차치하면 공포/스릴러 장르만큼 몰입을 주는 장르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공포영화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며 정말 무섭게 만들어 주겠다는 듯이 구성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반면 분명히 공포영화인데 군데군데 웃음코드가 들어가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전자의 공포영화를 정통호러로 부릅니다. 후자의 경우는 B급 호러영화라고 평합니다. 드래그 미 투 헬은 후자에 해당하는 영화입니다. 공포영화이긴 한데 일반적인 공포영화와는 다르게 느닷없는 유머와 예상치 못한 웃음이 섞여 있습니다.
공포와 유머
공포의 감정은 생명과 신체의 안전에 위협을 느낄 때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공포감이 들면 우리의 교감신경이 활성화되고 맥박과 호흡은 빨라집니다. 인간이 느끼는 가장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입니다. 반면 웃음은 생명과 신체의 평안함을 느낄 때 나올 수 있는 감정입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지극히 안전한 기분을 가질 때에만 웃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포의 감정은 가장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공포감을 느낍니다. 개체의 안전과 종의 존속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감정입니다. 초식동물은 공포감 덕분에 포식자로부터 재빨리 달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높이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에 절벽 가까이 다가가지 않습니다. 생명체의 지속성을 위해 필요한 감정이고 가장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반면 유머는 상당히 고등화된 단계의 반응입니다. 동물들이 서로 유머를 주고받는지에 대해선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영장류 이외에는 거의 드물어 보입니다. 특히 인간 이외의 동물이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웃기는 경우는 쉽게 보기 힘듭니다. 부드러운 농담과 유머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유머는 고등단계의 사회화가 이루어진 집단에서 두드러집니다.
또한 공포감은 본능에 따른 반응이고 사회문화적 요소가 적게 개입되는 감정입니다. 우리의 시신경이 맹수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감지하면 뇌에서 즉각적인 공포 반응을 만들어 냅니다.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심장박동을 빠르게 하여 즉각 도망갈 준비를 합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이 사자를 만났을 때의 반응은 아시아의 소작농이 벵골호랑이를 만났을 때 반응과 다르지 않습니다.
반면 유머는 사회문화적 요소가 크게 개입되는 감정입니다. 상황에 얽힌 복합적인 문화적 코드가 함께 읽혀져야 합니다. 우리나라 유머와 일본 유머가 다르고, 아메리칸 유머와 프랑스 유머가 다릅니다. 외국 코믹영화를 볼 때 웃음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미국에서 흥행한 코믹영화인데 국내 극장가에 걸리지 않고 VOD로 직행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유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문화적 맥락과 사회적 배경까지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공포와 유머가 한 영화에 나온다면 어떨까요. 양 극단에 있는 감정이 공존하면 보통은 짬뽕 혹은 잡탕이 되어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훌륭한 연출가가 만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양 극단의 있는 감정이 한 스토리 내에서 적절하게 구성된다면 관객들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느낄 수 있습니다. 휘몰아치는 불안과 안정 사이에서 관객들은 묘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깜짝 놀라면서도 어느샌가 웃고있고, 한껏 긴장했다가도 일순간에 풀리는 느낌이 듭니다. 관객들은 독특한 영화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영화의 문법
어떤 영화는 전형적인 문법에 따라 관객들이 기대하는 요소를 충족시켜 줍니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화려하고 현란한 특수효과들로 시청각적 쾌감을 안겨줍니다. 멜로영화는 남녀주인공들의 갈등과 화해를 적절히 배치하여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시킵니다. 정교한 문법과 공식에 따라 깨끗한 정답을 만들어내는 느낌입니다.
반면 <드래그 미 투 헬> 같은 영화는 장르적인 공식을 따르는 듯하면서 중간중간 변주가 이뤄집니다. 공포영화의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웃음의 샛길로 가는 모습을 보다 보면 신선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개성있고 모범생답지 않은 영화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B급 감성의 영화라고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영화들 덕분에 우리의 영화적 감상이 좀 더 재미있고 풍요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전형적인 레시피를 따르는 요리보다 개성있는 레시피로 만든 요리가 더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영화를 볼 때도 가끔씩은 독특한 레시피로 만들어진 작품을 만난다면 색다르고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