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흐려 미술관을 가기로 한 날,
내셔널 갤러리를 방문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트라팔가 광장에 위치해 있습니다. 영국의 트라팔가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광장인데 광장 한가운데에는 넬슨 제독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트라팔가 연안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에 압승을 거둡니다. 전투 중 총상을 입은 넬슨 제독은 결국 숨을 거두지만, 승리를 거둔 영국은 해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고 넬슨 제독은 국가의 영웅으로 이름을 남깁니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의 힘을 바탕으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구축했으니 런던 시내 한 복판에 그 기념광장과 지휘관의 동상이 있는 것이 수긍됩니다.
트라팔가 광장을 잠시 둘러보다가 내셔널 갤러리로 입장합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입장료가 무료입니다.
런던에선 대부분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료입장할 수 있다고 하니 여행객 입장에서는 부담이 없습니다.
미술관 안내 지도를 받아 들면 어느 전시실부터 둘러볼까 설레기 시작합니다.
시대순으로 살펴볼지 좋아하는 작품 위주로 찾아볼지 잠시 행복한 고민을 합니다.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 작품입니다. 너무나도 높은 그의 명성과는 달리 실제 그가 남긴 완성된 회화작품은 20편이 채 되지 않습니다. 방문한 미술관에 다빈치 작품이 있다면 세계적인 미술관에 입장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안정감 있는 구도로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 성모 마리아의 푸른색 의상이 경건한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도 동일한 등장인물과 동일한 구도로 그린 작품이 있으니 런던과 파리를 함께 방문한다면 비교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우첼로의 <산 로마노의 전투>라는 작품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경쟁국가였던 시에나와 피렌체 간의 전투 풍광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작품은 원근법의 개념이 이제 막 나타나던 시기에 그려졌습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적 입체감을 주려면 소실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원근법에 심취해 있던 우첼로도 화면 하단의 부러진 창들을 소실점을 향하도록 배치해 놓았습니다.
다만 원근법의 초창기이다 보니 그 배치된 모습과 구도가 다소 인위적이고 어색합니다.
다음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입니다. 작품 속 소품들은 다양한 은유를 담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 하단에 있는 납작한 타원을 그림 우측 편에서 바라보면 커다란 해골이 보입니다.
죽음의 상징인 해골을 배치하여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 네가 언제든 죽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의 의미를 그림에 담았습니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며 그림을 보는 기분입니다.
발걸음을 옮기다가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화면 중앙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눈을 가린 채 있습니다. 옷차림을 보니 왕실의 사람이고 눈을 가린 채 손을 뻗는 동작으로 보니 처형대를 찾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로 옆에 선 남자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팔을 이끌어 처형대의 방향을 찾도록 도와줍니다.
왼편에서는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무너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한 명은 충격에 실신을 하듯 주저앉았고, 또 다른 한 명은 차마 이 장면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뒤돌아서 벽을 짚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편의 사형집행자는 서슬 퍼런 도끼를 든 채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역할 수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는 그림이길래 이토록 안타까운 장면이 묘사되었을까요.
이 작품은 폴 들라로슈가 그린 <제인 그레이의 처형>이라는 작품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영국 튜더 왕조 시기입니다. 강력한 왕권을 발휘했던 헨리 8세는 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다뤄지듯 여섯 번의 결혼을 하였고, 두 번째 부인 앤과의 결혼을 위해서는 로마 교황에 등을 지고 영국 국교회를 창시하기도 합니다.
파란만장한 결혼사와 강력한 왕권을 선보였던 헨리 8세의 사후,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합니다. 하지만 병약한 에드워드는 금세 사망하고, 이제 다음 왕위 계승자가 영국의 왕이 될 차례입니다.
왕위 계승 순번으로는 첫째 부인이 낳은 딸 메리 1세가 왕위에 올라야 합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가 오르면 영국이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아갈 것이 염려된 신교 세력이 전략을 세웁니다.
존 더들리 공작이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해 왕위 계승 순위도 한참 밀리고 정치적 입지도 마련되어 있지 않던 며느리 제인 그레이를 다음 왕위 계승자로 지정하게 만듭니다.
어리지만 총명하고 겸손했던 제인은, 애초 권력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원치 않게 전개되고 말았습니다. 시아버지와 신교 세력에 의해 반강제로 다음 왕으로 추대됩니다.
결국 제인은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한 후 영국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메리와 그 추종 세력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합니다. 메리가 런던으로 입성하고 런던 시민들도 메리가 왕위에 앉도록 지지합니다.
결국 제인은 단 9일 만에 왕위를 내려놓고 런던탑에 투옥됩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왕위에 올랐다가 폐위된 제인 그레이.
메리도 처음엔 제인 그레이를 처형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듭된 반란에 제인 그레이의 가족이 얽혀 있다 보니 결국 사형이 언도되고 맙니다.
메리도 너무나 안쓰러웠는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마지막으로 사형은 면하게 해 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신앙심이 투철했던 제인은 끝내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합니다. 결국 제인은 만 16세의 어린 나이에 처형대에 올라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당시 제인은 눈을 가린 채 있어서 처형대를 한 번에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손을 뻗어 처형대를 더듬어 찾아야 했고, 그때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화가에 의해 표현되었습니다.
제인 그레이의 참담한 운명과 순백의 드레스가 대비되어 비극적인 감정이 더 극적으로 연출됩니다.
권력다툼에 휘말려 미처 꽃 피우지 못한 삶의 안타까움이 작품 속에 깊게 배어있습니다.
내셔널 갤러리에는 수많은 회화 작품들이 있고 거기에는 방대한 사연과 역사,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회화 작품을 좋아한다면 두세 번씩 와도 좋을 보물창고 같은 미술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