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이 올거야, 하지만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
날씨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자주 묻던 말이다. 누군가는 여름이 좋다고 한다. 우선 자기는 더위를 잘 안 타고, 패션 감각을 다양하게 살리고 싶으며, 싱그러운 이파리와 매미 울음소리에 정겨움을 느끼니 여름이 좋다고 한다. 난 겨울이 좋다고 한다. 우선 여름은 다 벗고 있어도 덥지만, 겨울엔 두껍게 껴입을수록 살 만하니까. 여름의 더위는 에어컨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냐고 묻겠지만, 에어컨을 틀면 지구 온난화 때문에 죄책감이 느껴져 달갑지 않으니 패스. 그리고 겨울만이 주는 포근한 감성이 좋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보고 있으면, 한 해를 겪으며 스쳐갔던 모든 근심과 걱정이 리셋되는 느낌이라. 눈 덮인 풍경을 보면, 해묵은 낡은 감정들을 정화해 다음 해를 웃으며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겨울이 좋다.
하지만 사실, 내 단순한 질문에 가장 현명한 답변은 이거다. 여름도 싫고 겨울도 싫으니 차라리 봄, 가을 중에서 택하겠다는 답변. 그럼 난 농담 삼아 이렇게 얘기한다. 아니 안돼. 여름이랑 겨울 중 하나만 골라. 우리나라 사계절 중에서 그 두 계절만 남았다 생각하고. 왜 이런 질문을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서. 물론 특정 계절을 좋아하는 것이 그 사람을 정의 내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특정 계절을 좋아하는 것이 그 사람만의 어떠한 특성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재밌어서 물어보는 것이다. 여름의 청아함과 겨울의 포근함은 둘 다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찌는 듯한 더위와 오들거리는 추위라는 양 극단의 고통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하나를 선택한다면, 좋은 측면을 보고 선택하는 것도 좋겠지만 어떤 고통을 선택할 것인지 물어보는 것도 나름 그 사람에 대한 새로움을 알아갈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걸 물어보는 게 조금은 꺼려지더라. 이젠 우리나라 사계절이 정말 여름과 겨울밖에 남지 않을 것 같아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농담처럼 말하는 건 쉽지만, 막상 닥칠 것 같은 일에 대해서는 농담 삼기가 쉽지 않으니까. 몇 날 몇 일 비만 주룩주룩 내린다. 원랜 이게 눈이었어야 했는데. 해가 지날수록 변하는 날씨를 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아니, 10월 말인데 단풍은 안 드나? 의문을 가질 무렵 산새가 붉게 물든다. 가을아, 너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붉게 물든 이파리들을 보며 미소 짓지만, 어느새 날씨는 급격히 추워진다. 싱그럽던 이파리들은 낙엽이 되어 추운 바람에 이를 딱딱 부딪히다가 나가떨어진다. 추위가 내쫓은 그 자리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남아 있다. 고통조차 무감각해진 듯 눈보라에도 꿋꿋이 버티면서. 그러다 잠깐 꽃이 피겠지. 추위에 권태기가 온 우리들은 잠깐의 따뜻함에 탄성을 내지르겠지만, 그건 눈 깜짝할 사이에 절규로 바뀔 것이다. 후덥지근한 더위 속에서 우리들의 절규는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울렁이는 아지랑이가 공기를 익혀버릴 테니. 우리에게 심호흡할 여유를 주는 꽃과 단풍은 언제쯤 모습을 감추게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삶 또한 변해가는 계절의 주기와 닮아 있다고. 마치 시간이 흐를수록 따뜻한 봄과 시원한 가을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내 삶에도 여유와 평화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앞뒤 재지 않고 눈앞에 닥친 일들을 소화해가며 사는 동안에는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봄과 가을이 원래 이렇게 짧았나 의아해하는 것처럼. 내가 이런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는 사람이었나. 원래 이렇게 정이 없는 사람이었나. 바다가 되기로 다짐한 마음은 어느새 옹졸한 우물이 되어 애꿎은 사람들만 상처 입힌다. 그럴 때면 생각하곤 한다. 내가 타인을 지나치게 덥게, 혹은 지나치게 춥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게 아닌데. 내가 화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당연한 얘기겠지만, 내 마음이 옹졸해지는 건 전적으로 외부의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마치 지구 온난화가 봄과 가을을 없애는 것처럼. 바다와 같던 유년의 마음은 정답을 배워가다가 어느새 정답만 갈구하며 살아가게 된다. 유년의 마음속엔 모든 것들이 가능성으로 남아 긍정되지만, 이내 그것들은 자라나며 재단되어 편협해진다. 줄어드는 꽃과 단풍의 계절처럼 우리 마음의 공간 역시 수축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모든 꿈과 가능성, 낭만이 침식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심심할 때마다 친구들에게 물어봤을 때를 떠올려본다.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 대체 난 무엇이 궁금했던 걸까. 더위와 추위 양 극단의 고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더위를 견딜 수 있다면 매미 울음소리가 정겹기 때문일 것이고, 해변가에서 신나게 놀 수 있기 때문일 것이고, 싱그럽게 만개한 푸른 나무들의 생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을 견딜 수 있다면 쌓인 눈을 뽀드득 밟으며 포근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고, 아이들이 웃으며 눈사람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고,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분위기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든 폭염과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봄과 가을이 사라져 감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면서 옆에 있는 친구에게 묻는다. 넌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 친구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한다. 여름이 좋다고. 일단 여름은 싱그럽고 삶의 활기가 차오르니까. 봄과 가을을 합쳐서 생각해봐도 자기는 여름이 제일 좋단다. 겨울은 뭔가 죽음이랑 연관된 계절 같아서 싫단다. 픽 웃음이 새어 나온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 계절을 죽음과 연관 지어본 적이 없던 것 같아서.
우리는 똑같이 삶을 열망하지만, 꿈꾸는 이상의 모습이 이토록 다르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상황이 부러운 순간일 수 있을 테니까. 부유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온실 속 화초가 되지 않기 위해 고통에 몸 던질 수 있을 테니. 싸움을 못하는 사람이라면 멧집을 키우기 위해 기꺼이 맞겠다고 나설 수 있을 테니. 관심을 못 받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모두가 꺼려하는 무대의 중앙에 서겠다고 기꺼이 손을 번쩍 들 수 있을 테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봄과 가을이 사라지는 세상 속에서도 기꺼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 테니.